잠옷처럼 입는 회색 민소매 원피스에 검은 카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잠옷처럼 입는 회색 민소매 원피스에 검은 카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이달 초에 구입한 챙이 넓은 감색 모자를 쓰니 별로 후줄근해 보이지는 않는다. 낡은 신도시 아파트의 점심시간은 시내의 건물과는 달리 고요하다. 아스팔트와 인도 위로는 벌써 더운 햇볕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나는 단지를 빠져나가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온 아주머니나 스포츠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지 않은 경비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외출용으로는 좀 촌스러운 에코백을 손목에 걸고 대형마트로 걸어가는 내 모습이 카페 통유리창에 비친다. 영락없는 한낮의 가정주부다. 젊은, 이라고 덧붙여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 혼자 살아도 가정주부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가정: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
주부: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
현재 내게 사전적 정의의 가정은 없지만, 어쨌거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세대주로서 나를 반쪽짜리 가정주부라고 치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트에 다다른다. 마트로 곧장 내려가기 전에 대형서점 먼저 들린다. 서가를 둘러보다 에코백에 넣어온 접이식 블루투스 키보드를 꺼내고 다음 주에 인터뷰를 나눌 취재원들에게 전달할 사전 질의서를 작성한다. 질문이 막힐 때면, 이런 모습은 덜 주부 같은가,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도 내 정체에 대해 궁금하거나 정의를 내려줄리 없다. 우선 서점에 사람이 없다. 낮의 서점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는 가정주부들을 상상해본다.
어제 살까 말까 고민했던 책을 결국 오늘 사버리고, 책을 산 김에 차와 티 푸드를 좀 먹으면서 책을 좀 읽다 마트에 가야지. 너무 늦지 않게는 일어나야지. 짐짓 여유로워 보이는 이 오후가 우습다. 말일이 될 때까지는 어떤 약속도 새로 잡지 말아야지. 돈을 아껴야지. 아낀다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마음을 아낀다고 달리 말해보자. 마음을 아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
What do you know, It happened again, What do you k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