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은 May 29. 2019

The record #13_시계를 사고 싶어

사실, 아픔을 겪지 않은 손에 더 어울릴법한 시계였다.

Ilinca Roman / https://unsplash.com/@ilincaroman

나를 기자 생활로 인도한 친정매체이자 현재 내 수입의 8할을 차지하는 잡지의 마감을 끝냈다. 교정지를 손보고 디자이너와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고 인쇄소에 데이터를 넘기고 받기까지의 과정이 오늘따라 유난히 매끄러웠다.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나도 서부간선도로에 진입했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와 저녁상을 차릴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냉장고도 마침 거의 비어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야채칸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양배추의 시든 부분을 잘라내어 삶고 세 개 남은 계란 중 하나를 깨서 부치고 냉동실에 얼려둔 파와 언제라도 바닥날 리 없는 김치를 볶아 통깨를 뿌려서 그런대로 먹을 만한 식사를 했겠지만, 오늘은 도무지 그런 살뜰함을 끌어올리기 힘들었다. 누가 차려주는 밥을 한시라도 빨리 먹고 싶었다.


결국 동네 콩나물국밥집에 들러 콩나물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은 양파절임을 씹으며 조바심을 내고 있을 때였다.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보다 특별할 것 없고 내일과도 다르지 않을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던 중 엄마는 대뜸 이모가 올 초에 산 명품 브랜드의 시계를 사겠다고 내게 말했다. 10월에 환갑을 맞는 당신을 위한 선물이라면서. 마침 이모는 같은 브랜드의 상위 버전의 시계를 살 계획이라 새것이나 다름없는 그 시계에 흥미가 좀 떨어졌다나 뭐라나. 그래서 엄마만 괜찮다면 이모가 큰 에누리로 시계를 팔 생각이 있다는 것까지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돌솥비빔밥은 여전히 조리 중이었다.


엄마의 계획은 이렇다. 아빠가 애초에 자신의 기념적인 생일을 맞아 주려는 돈에서 꼭 그만큼의 돈을 더 받아내는 것. 나머지는 자신이 악착같이 모아둔 돈에서 일부를 충당하고, 여기에 앞으로 5개월 남짓 한 시간 동안 생활비를 아껴 모자란 돈을 채울 예정이란다. 참, 여기에는 내가 그녀의 환갑잔치 또는 여행을 위해 미리 공지해놓은 금액도 포함돼 있었다. 엄마의 말투에는 평소답지 않게 결연한 구석ㅡ그건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네가 나를 무어라 생각해도 나는 반드시 사고야 말겠다!"ㅡ이 있었고, 때문에 나는 괜스레 이모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나게 정말로 엄청나게 비싼 시계 같지만 또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이렇게 온 가족이 좀 호들갑을 떨어야만 살 수 있는 시계까지는 아닌 것이다. 엄청나게, 정말로 엄청나게 비싼 시계라면 나도 죽기 전에 손목에 한 번 차보자! 라는 생각조차 못 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엄마의 사뭇 비장한 목소리라든지, 그리고 나의 이런 무의식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건, 그 시계값은 적어도 내가 알기론 아빠가 한 번도 한 달 안에 벌어보지 못한 돈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두 달 치 월급이라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나는 엄마를 비난할 생각도, 아빠를 동정할 생각도 없다. 지난 30년의 세월을 돌아보면 엄마의 손목에는 그만한 물건이 어쩌면 진즉에 채워졌어야 할 것이었으므로. 무엇보다 아빠는 기꺼이 그 돈을 마련할 것이었다. 나처럼 의뭉스러운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아빠에게 엄마는 조금 한심하고 많이 귀여운 사람일 테니까. 우리 형편에 다소 철없는 제안이라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선 받아들일 것이다. 엄마가 난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아빠는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사실, 아픔을 겪지 않은 손에 더 어울릴법한 시계였다.


결국 문제는 나였다. 밥을 먹으면 든든한 기운이 돌 테고, 그러면 역 앞의 마트까지 걸어서 장을 보러 가야지 라는 생각은 엄마의 전화로 단 번에 사라졌다. 그래도 냉장고는 채워놓아야 할 터였다. 채소 두 종류와 바나나 한 송이, 요거트와 버터를 카트에 담고 계산대로 향하는데 갑자기 와인이 마시고 싶어졌다. 오늘 내 장보기 예상 목록에 없던 물품이었다.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일 음료. 그러나 나는 기어이 와인 코너를 둘러보며 애인과 자주 마시던 와인을 고를지, 할인폭이 가장 큰 와인을 고를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애초에 약속한 돈에서 꼭 그만큼을 더 얹어 말했다. 선심을 쓰는 것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미안해하면서도 그 돈을 거절 않고 받을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게 쓸 것이다.


오늘의 저녁은 마침 유월부터 1년 동안 계약하게 된 외주 일 덕분에 가능한 해피엔딩이었다. 내일은 그 일을 제안해준 선배를 만나러 간다. 고마운 마음이 배가 되었다. 어떻게든 재고 또 재면서도 틈틈이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고른 와인은 맛이 아주 좋았다. 주말에 엄마가 올라오면 같이 마셔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The record #12_나의 '하'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