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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27. 2019

The record #12_나의 '하'에게

오랜만에 하를 만났다. 하는 내 오랜 친구다.

오랜만에 하를 만났다. 하는 내 오랜 친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당시에는 친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우리가 다 자란 뒤 하가 사진앨범에서 자신의 아홉 번 째 생일파티에 내가 초대되었고, 심지어 내가 하 바로 옆에서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이 지금의 우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한 번 더 하와 같은 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교를 하면 보습학원 대신 혜화역으로 노래를 부르러 다니는 아이였고, 하는 학교에서 남자애와 여자애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친구였다. 심지어 다른 학교 아이들도 하를 아주 잘 알았다. 어떤 아이들은 하에게 혹시나 밉보이지는 않을까 조금은 긴장하면서 그녀와 어울렸지 싶다.


하에게는 그 나이 때의 몇몇 아이들이 자연스레 타고나는 특유의 친화력과 그러면서도 관계에서 묘하게 우위를 선점하고 마는 힘이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얼핏 외향적으로 보이나 내면은 아주 소극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문득 우리가 이다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오래된 우정들이 그러하듯 우리 사이에도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우정이 생긴 것은 아니다. 혹시 하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곳을 희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교복을 입고 난 다음부터 부쩍 더 친해졌다. 하가 다닌 학교는 교복보다도 체육복이 예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반면 우리 학교의 경우 교복이라면 그 지역의 으뜸으로 꼽혔지만 체육복 디자인은 영 형편없었다. 이렇게 하등 쓸모없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날이면 하는 얼마 후 어디서 구했는지 자기 학교의 체육복 한 벌을 내게 건네면서 불쑥 감동시키곤 했다. 그 즈음의 나는 태연하게 다른 학교의 체육복을 입고 수업을 들을 만큼 꽤나 대범해졌지만 여전히 또래 아이들과 무리 지어 관계를 맺는 데에는 어떤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속으로는 잘 웃지 않았고, 제 가식에 스스로도 소름이 끼칠 때마다 자꾸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로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는 분명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서울이 아닌 동네로 노래를 부르러 다녔고, 그마저도 그만두었을 때는 글을 쓴다고 도서관이나 서점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하를 비롯한 친구들로부터 언제든 도망치기에 아주 좋은 환경에 있었다. 사계절 내내 과일 빙수를 먹으면서, 놀이터 그네를 타면서, 하와 우리 집 사이에 있는 하의 학교 근처 정자에 누워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주로 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하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는 해줄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딱히 듣는 데에 취미가 있어서라기보다, 언제나 나보다 그 애가 할 말이 더 많아 보였으므로. 내게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니, 근데, 있잖아'로 시작할 만한 말이 없었다. 그 애가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내고 난 뒤 자연히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나는 혹여나 하 앞에서도 말과 표정을 꾸며내지는 않았는지 이제와 조금 걱정된다. 그때부터 쓸데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피곤한 습관이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렇다고 대단히 근사한 무엇을 그려내지도 못할 거면서.


어쩌면 하가 영영 읽을 리 없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이 이야기를 길게도 늘어놓는 이유는 하를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겨우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는 아주 가까운 이웃이기도 해서, 누구 하나 긴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봤자 이 주일을 넘기는 일은 거의 없다. 때문에 오늘도 조금은 드문 이 주일 만의 만남 중 하나일 뿐이었다. 특별할 게 있다면 하와 동네 스타벅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새삼스럽게도 하는 앞으로도 내가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친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녀가 나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우리는 여전히 10대의 온도로 서로를 애틋하게 대하고 있어서 이런 짐작은 이상하리만치 당연한 일인데도, 마음 한 면을 스윽 훑고 지나가는 그 생각에 조금 슬퍼져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익숙하게, 속으로만.


하가 자꾸만 제 주변에 결혼을 한 친구와 동료들의 이야기만 늘어놓아도, 그 이야기가 대부분 네이트 판에서나 볼 법한 신파를 갖고 있어도, 여초회사에서 자신이 겪는 사소한 일상이나 스트레스를 때론 놀라울 만큼 전형적인 남성 위주의 시각으로 해석해도,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려고 노력 중인 나에게 순댓국과 소고기집 간판을 가리켜도, 결국 오늘도 자기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고 미안해하는 얼굴로 헤어지는 하여서, 그게 또 익숙하기도 한 나여서 나는 하를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나부터도 하를 만나면 내 근황을 전하려 하기보다는 오늘은 하의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까를 기대하며 가곤 하니까. 그래서 점점 더 하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나는 축소되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우정을 때때로 권태롭게 느낄지언정 절대로 하를 미워할 수도, 하와 멀어질 수 없다는 것을 오늘같이 아무런 계기도 없이 체감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건도 없이 우정을 쌓기 시작한 것처럼.


하는 어쩌다 내게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 애가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나는 불투명하게 어른거리는 미래의 하도 가만히 껴안아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동안의 하가 내게 그래왔듯이.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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