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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Jun 07. 2019

The record #14_당진에서 나눈 대화들

하여간 너 때문에 집에 전화할 때마다 동전을 이만큼씩 가져가야 했다니까.

@ 당진


월요일

“하여간 너 때문에 집에 전화할 때마다 동전을 이만큼씩 가져가야 했다니까.”


당진 집에 내려와 있는 이번 주. 오랜만에 세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 평일 저녁이었다. 아빠는 올봄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을 붙여 돌보기 시작한 길고양이(뻔돌이) 이야기를 하다가 뻔돌이를 괴롭히는 한 얼룩 고양이를 모글리에 등장하는 ‘시어 칸’에 빗대었다. 나는 시어칸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너 시어 칸 모르니, 시어 칸? 모글리 괴롭히던 호랑이!”

아빠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정글북>을 말하고 있던 것이다. 뻔돌이를 괴롭히는 고양이가 어찌나 사나운지를 말하려다 일곱 살 딸과 함께 봤던, 그 시절 딸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 사람.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가 이내 뭉클한 마음이 밀려와 아빠의 술잔에 잽싸게 소주를 따르면서 괜히 능청을 떨었다.


“올~ 그걸 어떻게 기억해? 나도 거의 까먹을 뻔했는데. 아빠 기억력 짱이네!”

아빠는 약간 한심하다는 듯(혹은 서운한 듯) 나를 쳐다보다가 한 번 더 시어 칸을 흉내 내더니 회를 한 점 집어먹었다. 웃기면서도 좀 슬펐다. 이빨 빠진 호랑이네 우리 아빠.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옆에서 엄마가 말을 이었다.


“네가 아빠 출장 가있으면 저녁마다 그날 본 비디오며 책이며 아빠한테 미주알고주알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을 안 할 수가 있겠니.”

내가? 내가 그랬다고? 직업 특성상 아빠가 속초며 제주도며 해안도시로의 장기출장이 잦았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풀어놓기 시작한 이십몇 년 전 이야기는 아주 낯설었다.


“하여간 너 때문에 집에 전화할 때마다 동전을 이만큼씩 가져가야 했다니까.”

아빠는 커다랗고 두툼한 두 손을 동그랗게 모으면서 말했다. 나는 상상했다. 삼십 대 후반의 아빠를, 매일 저녁 공중전화 부스로 묵직한 걸음을 옮기는 아빠를, 양쪽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씩 꺼내며 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아빠를.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모글리의 모험이 길어지면 벽에 기대거나 하품을 했겠지.


나는 앞으로 아빠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내 생각에, 아빠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궁금해하는 것 같진 않은데. 그런 시절은 아주 옛날로 지나가버렸는데. 하긴, 나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테다. 아빠에게라면 무엇이든 털어놓고 싶은 나이는 찰나에 불과했으니까. 금요일에 서울로 올라가면, 저녁을 먹고 아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무슨 말을 할지는 당진에 지내는 동안 생각해봐야지.


화요일

“그래서 요즘은 그냥 멀리 놀러 갔다고 말해요.”


아침이 되었고, 디지털 노마드인 나는 와이파이가 터지는 카페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사장님이 3년 전에 거둔 고양이 아미가 2주 전에 로드킬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전 11시, 산 밑에 있는 카페에서 손님은 나밖에 없었고 사장님은 오랜만에 온 내가 아미를 찾자 슬픈 얼굴로 소식을 일러주었다. 이 도시에서는 수술이 불가해 결국 안락사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까지.


“아미가 사람을 워낙 잘 따라서 찾는 손님들이 많아요. 그런데 죽었다고 하면 다들 어떻게 죽었냐, 왜 죽었냐 물을 텐데 일일이 말할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그냥 멀리 놀러 갔다고 말해요.”


오후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당에 누워있는 뻔돌이를 본다. 겨우 이틀을 봤을 뿐인데 내가 제 이름을 부으면 쪼르르 달려온다. 뻔돌이를 집에 들이지 않고 마당에서만 기르려는 부모님이 조금 원망스럽지만 내가 당장 어쩌지 못하는 걸 고민하기엔 너무 한낮의 햇살을 받은 뻔돌이의 등이 너무 부드럽다. 그저 우리 집에 놀러 온 네가 아주 머물러주길 바랄 뿐. 너 사는 동안은 같이 살자, 라고 말한 아빠의 말처럼.


수요일

“알게 뭐야 내가.”


확실히 본가에 내려오면 놀라울 정도로 게을러진다. 엄마는 이곳만큼 글쓰기 좋은 곳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한동안은 나도 그 말에 동의했지만 사실은 틀렸다. 나는 완벽히 평화로운 곳보다 일상의 긴장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나마 몇 줄이라도 쓰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이를테면 내가 사는 집-내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너무 많이. 모종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렇다고 늘 쓰는 것은 아니지만) 때문에, 호텔처럼 내게 무해한 공간에서 글쓰기를 선호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는 그가 이미 베스트셀러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못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일은 내 요지경 나날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아프고 울고 화내고 서러워하고 속상해하고 그 사이사이 기뻐한 흔적이 가득한 곳으로. 이번에는 무엇을 쓰게 될까. 아니, 꼭 써야 하나. 아직은 마음껏 게을러져도 괜찮은 밤이라 생각이 좀 멋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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