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고 있음을, 아니 이미 도착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아니 이미 도착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요 며칠, 외출 전에 얇은 겉옷이라도 챙겨야 하나 고민을 하다 그냥 집을 나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지나치게 한기를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평온한 표정인데 나만 안절부절못하었다. 결국 약냉방칸으로 옮기거나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에어컨 날개를 덮곤 했다. 추위보다 더위를 훨씬 많이 타는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귀갓길에는 놀랍도록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탓에 집에 오면 전기장판을 켜고 잠을 청했다. 어제도, 그제도 물론.
그래서 올해는 여름이 아직인 줄 알았다. 태연히 전기장판 위에 누우면서 안도까지 했다. 이런 이상 징후들이야말로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걸, 오늘에야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가늠할 수조차 없는 깊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진단받은 적은 없으므로 우울'증'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여름은 줄곧 내게 까닭 없이 우울을 앓게 되는 계절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더위를 많이 타는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여름에 내가 남긴 일기들을 보면 우스울 정도로 같은 패턴이어서 사람은 정말이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할 수 있을 정도다.
여름은 내가 태어난 계절이어서, 1년 중 가장 많은 사랑을 체감할 수 있는 시기이지만 바로 그 점이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다. 바람에서 여름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내가 여름잠을 자버리는 동물이었으면 하고 바랐으니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여름은 내게 상실로 기록되는 계절이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거나 망칠 수밖에 없는, 영영 내 것이 될 수 없는 기분이 지배하는 일상을 100일 가까이 보내야 한다는 건 너무 지옥 같은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글들이 10년에 걸쳐 변주되어 온 것이다. 아마도 지금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익숙하지만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기억나지 않은 그 숱한 여름들을 생각하면 나는 내가 아주 불쌍해진다. 사는 동안 많은 것을 미워해왔지만 10년을 꾸준히 미워한 것은 여름뿐이어서, 이러다 여름보다 여름을 미워하는 나 자신이 미워질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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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여름이 왔음을 인정하고 패배감으로 귀가한 오늘. M이 빌려준 소설 제목이 마침 《가을》이어서 어쩐지 부적을 대하듯 이야기를 읽어낼 것만 같다. 비록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지만….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Look at you 한 손에 든 핑크 칵테일 바닷바람과 함께 쐬는 태양빛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느긋한 여유로움
들어봐 이젠 느껴지지 않는 진동
신경 쓰이던 그 선배의 한마디
이젠 너와 상관 없는 어제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