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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05. 2017

[베를린 살이] der Ewige

영원한 자, 신

오늘의 기분을 닮은 양말과 오늘의 경유지. 동물원 역(Zoologischer Garten Bhf)이다. S반과 U반이 함께 연결돼 있어 이곳에서 어디로 이동하든 편리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베를린 방문객들에게 유명한 100번, 200번 버스의 종착지이기도 해서 이 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만 투어해도 눈이 즐겁다. 날이 궂으면 궂은 대로 편하게,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2층 버스의 넓은 창에 비치는 해사한 뷰를 즐기기에 딱이다.

 



베를린 돔과 박물관 섬을 둘러싸고 있는 슈프레 강. 5개의 박물관 중 월요일 휴관으로 방문하지 못한 보데 박물관과 알테 뮤지엄, 그리고 알테 내셔널 갤러리를 보는 게 오늘의 일정이다. 개인적으로 박물관 섬의 박물관을 하루 만에 다 보는 건 약간 정신을 혹사시키는 일이라고 생각돼서 (사실 몸은 그리 피곤하지 않다. 이동경로가 짧다 보니) 이틀에 걸쳐 박물관 섬을 투어하고, 마지막 하루를 꼭 가보고 싶던 (그 중에서도 뮤지엄 패스권이 통하는) 박물관을 두어 곳 들르면 무리 없으면서도 알차게 베를린 내 박물관 관광 일정을 소화하지 않을까 싶다.


베를린의 베스트 박물관만 모아놓은 만큼, 이 섬 위의 박물관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시간은 결코 아깝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나처럼 세계사와 예술에 대한 조예가 얕은 사람들일수록 감상의 범위가 넓은 법. 지적 허영을 위해서든, 개인적인 작업을 위한 영감 때문이든 박물관은 관람객 대부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이니까.


박물관 투어 이틀 째, 아침 일찍 움직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이좋게 모여 있는 다른 박물관들과 달리 섬의 북서쪽 끝에 다르게 홀로 떨어져 있어서일까. 보데 박물관을 거니는 관람객들은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나는 이곳에서 박물관의 입구를 지나 첫 번째 섹션로 향하는 길까지 길게 나 있는 복도를 홀로 거닐었는데, 박물관의 서늘한 공기와 조각상의 굴곡을 따라 부서지는 햇살이 내 걸음마다 따라오는 듯해 굉장히 황홀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서 한 번 더 재 입장을 했다. 여전히 혼자 문을 열고 복도를 거니는 은밀한 기회가 주어졌다.)


보데 박물관은 중세의 조각품과 비잔틴(동 로마제국) 예술품 위주의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거대한 작품과 홀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초점이 없고, 더러는 눈동자마저 없는 이 작품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처음은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할 것만 같았고, 그다음은 '구경'하는 마음으로 온 자신이 어쩐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마치 스스로 탄생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보데 박물관에서. 조각상과 잘 어울렸던 한 여인의 뒷모습.




알테 내셔설 갤러리(구 국립미술관)에서 내 눈에 가장 독일스러웠던 섹션과 루느아르,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 한 점. 두 작품명 사이의 거리가 넓다. <Summer>, <Small Death Scene>

가장 기대가 컸던 미술관 투어까지 마친 기념으로, 박물관 섬이 새겨진 연필을 샀다. 흔히 이곳에서 먹는 점심보다 비싼 값이었다. 앞으로 베를린에서의 일기나 메모는 이 연필로만 쓸 것이다.




아침과 점심을 지나치게 가볍게 먹은 탓에 오늘만큼은 그대로 집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허기가 졌다. 마침 동물원 역 근처에 비키니 베를린(Bikini Berlin)이라는 베를린 최초의 복합 공간이 있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수중의 돈으로 먹을 수 있는 최상의 비주얼을 찾아냈다. 짐블록(Jim Block)이라는 햄버거 집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Hamburger의 기원이 Hamburg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각지도 않게 함부르크 지방의 Das Hamburger Original을 맛보게 되다니. 아-무것도 모른 채 루꼴라가 들어간 리미티드 메뉴를 시키길 잘했다. 모든 메뉴의 패티가 100% 소고기라는데 가격이 너무 착하고, 맛있고, 또 맛있었다. 고향(함부르크)에서 베를린에 입성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은 듯.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이 좋았네- 라고 되뇌면서 'Lucky me'라는 숙어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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