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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10. 2017

[베를린 살이] 주말의 단상

어느 구름에 비가 온다든가

베를린에서의 첫 대자연이 시작되었다. 예상하고 있던 날이었다. 모든 일정을 재정비하며 비키니 베를린의 테라스 정원에 앉아 대자연을 견디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을 찾았다. 정수리와 등 뒤를 데우는 햇빛,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에 닿는 구름. 참, 너무 많은 바람은 필요 없다. 이곳에서 백예린의 미발표곡 직캠을 배경음악 삼아 뱃속의 폭풍을 달랬다. 그녀는 일종의 내 길티 플레져인데, 돌이켜보면 날 위로하거나 성장시킨 건 대부분 길티 플레져들이었다. 그러니 길티 플레져라는 말은 없어져야 한다고 잠시 혼자 우겨본다. 




바람이 거세져 쇼핑몰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몸이 무거워졌다 느껴질 때면 한동안은 끼니를 거르진 않되, 조금은 속이 비어 있는 채로 다니곤 하는데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는 순전히 수중의 돈을 아끼고자 함이었다. 왠지 타지에서는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을 때보다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할 때가 더 서러울 것 같아서였는데 이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사고 싶은 것을 언제나 사지는 못 했던(못 하는, 못할) 인생이니 말이다. 그런 내가 손에 쥐는 거라고는- 사고 싶었던 것보다 덜 사고 싶었던 것, 1순위로 사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고 싶었던 것만큼의 만족을 주면서 단숨에 지갑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 것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여기서는 식사를 아주 배부르게 하지 않아야 겨우 차순위의 것들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불공평한가. 나도 그나마 나의 욕심이 과하지 않음에 감사한 요즘이다.

문득, 이게 나라는 인간의 절댓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도 샐러드와 음료가 포함된 파스타 세트 대신, 커피와 케이크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3만 원대의 스카프는 (하물며 세일가임) 여전히 조금 비싸다고 여기는 나. 하지만 플리마켓의 그것들은 또 (주제에) 구질하다고 느끼는 나. 늘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내가 서글퍼지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도 나는 그대로여서 오히려 덜 우울한지 모른다. 만약 이곳에서 내가 지나치게 윤택한 생활을 한다면, 또는 빨강머리 앤처럼 매일 200% 긍정적인 마음만 가진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굉장히 절망적일 테니까.


오늘도 난 이 여행이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지게 만드는 시간이 되지 않길 기도해. 부디 집으로 잘 돌아가기 위한 여행이었으면 좋겠어. 돌아가서의 생활에 건강한 영향을 미치는 여행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 더는 나라는 절댓값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사는 삶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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