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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11. 2017

[베를린 살이] ein Zufall!

우연이네요!

늘 꽃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경이로운 아침이다.

비단 집 근처의 화단뿐만 아니라, 베를린 시내의 어디를 가도 시선의 끝에는 꽃이 닿는다. 심지어 조화일망정 화장실에서조차도. 베를린에서 눈을 뜨는 나날은 익숙해지고 있지만, 서울과 비교했을 때 이런 사소한 풍경의 차이는 여전히 반가운 낯섦으로 남아 있다. 돌아가서 가장 그리워할 베를린의 풍경도 이처럼 아주 작은 프레임들일 것이다. 

오늘의 날씨를 닮은 상큼한 색감

엄마가 예쁘게 여행 다니라고 깜짝 선물해준 청바지와 작년 가을, 대만에서 산 가죽 신발을 여기 베를린에서 개시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돈과 시간과 마음이 담겨 있는 아이템들. 사랑은 이런 식으로도 기억되고 기록할 수 있다.




베를리너 스트라세. 베를린의 지하철역 디자인은 너무 감각적이다.

오늘부터는 그동안의 베를린 필수 관광코스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로컬에 스며드는 일정이었다. 그 첫걸음으로 미테(Mitte)를 가던 중 환승지에서의 급작스러운 지하철 운행 중단. 허탈함도 잠시, 평소 역을 지나칠 때마다 눈에 띄었던 베를리너 스트라세(Berliner Strasse)로 일정을 우회했다. 얼마나 베를린스럽길래 '베를리너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궁금했던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별게 없었다. 나는 환승지에서부터 이 역까지 두 정거장을 걸어왔는데 우리 동네만큼이나 훨씬, 훨씬 주거지 역할에 충실해 보이는 동네였다. (어쩌면 그래서 진짜 베를리너들만의 홈타운일지도 모르지만) 지나치게 평화롭고 조용한 이곳. 진정 월요일의 정오를 닮아 있었다. 

나도 아예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한낮의 산책을 즐겼는데, 유독 엄마가 생각나는 오브제들이 많은 거리였다. 만약 베를린에서 엄마와 길을 잃고 우연히 베를리너 스트라세를 걸었다면, 꽃과 조명을 사랑하는 그녀에겐 선물 같은 순간이 되었을 테다.




처음 베를린에 오고 싶게 만들었던 곳, 헤르만플라츠

베를리너 스트라세를 감상하는 동안 화창한 오후가 잔뜩 밀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처음 베를린에 오고 싶게 만들었던 노이쾰른(Neukölln) 지역의 헤르만플라츠(Hermannplatz)가 떠올랐다. 상대적으로 불안하다고 느껴진 치안 때문에 다른 곳에 머물고 있지만 이 지역만이 지닌 힙스러움이 퇴사 후 베를린에 오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태 관광객의 마인드로 베를린을 둘러보고 있던 터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늘처럼 우연이 지배하는 날에 방문하는 것이 작정하고 헤르만플라츠를 찾는 것보다 훨씬 더 그곳에 방문하기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았다. 다행히 베를리너 스트라세에서 이곳까지는 환승 없이 지하철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테이블마다 튤립이 놓여 있던 카페와 또 한 번 엄마를 떠올리게 한 골동품 가게. 베를린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마신 커피는 라테 마끼아또다. 베를린의 어느 카페를 가도 이 메뉴는 가장 비싼 가격에 속한다. 2유로 후반대에서 3유로 초반대를 웃도는 가격. 하지만 카페에 들를 때마다 몇 센트 더 저렴한 카푸치노보다는 라테 마끼아또를 마시는 편이 이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베를린 맛집이라고 소문이 난 베를린 버거 인터내셔널(Berlin Burger International)을 발견했다. 나는 어떤 여행에서도 맛집을 서칭하거나 또 그 맛집을 신뢰하는 편이 아닌데, 심지어 체류에 가까운 이번 여행에서도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장소를 검색할 때마다 종종 따라붙는 맛집 소개를 몇 번 훑곤 했더랬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베를린 버거 인터내셔널(BBI)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관광객들의 호평이 자자한 '더 캣츠 파자마 호스텔'과 바로 그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이 버거집으로 헤르만플라츠와 안면을 텄었구나. 
사실 헤르만플라츠에 와서도 이 버거집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한 채 마냥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쓰레기통 위에 장식된 화분을 보며 '과연, 베를린이군'이라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다 이른바 베를린 3개 버거집 중 하나라는 BBI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아 식사는 나중을 기약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점들이 혼자 하는 여행, 또는 중단기 여행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스케줄을 나와 동행인이 처한 '상황'이 아닌, 오직 '내 감정선'에 따라 더하고 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조금 들뜬 마음으로 BBI를 지나쳐 걷다가 이번에는 카페 'two and two'를 발견했다. 간판을 보자마자 어! 소리가 절로 나온 걸 보니, 나름 인상 깊었던 블로그 소개를 보았나 보다. BBI와 같은 블록에 위치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미 헤르만플라츠 역에 도착하자마자 카페를 들렀지만, 깨끗한 화장실도 가고 싶었고 이쯤에서 조금 쉬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two and two를 선택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문구류를 파는 카운터가 귀여웠고, 재즈힙합이 나오자 춤을 추며 음료를 제조하는 종업원들이 귀여웠다. 이곳에서 처음 먹어보는 까눌레라는 디저트와 오렌지나의 맛도, 생김새도 몽땅 귀여웠다. 유머러스한 사진들로 장식된 화장실까지도…. 역시 사람이고 사물이고 공간이고 귀여운 게 최고다.

쇼윈도와 거울 셀카에 맛 들인 요즘. 반사된 내 모습을 보는 게 즐겁다. 내가 정말 베를린에 있구나,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그런데 화장실을 다녀오니 한국인 남성 두 명이 내 뒷자리에 착석해있었다. 그들은 이내 다양한 형태의 미술에 대해 논했는데, 그중 한 명은 '존나'를 쓰지 않고는 부사를 완성시킬 수 없어 보였다. 또 다른 한 명은 그보다는 점잖았지만, 목소리를 지나치게 내리깔고 대화를 이어갔는데 사뭇 진지한 대화가 오갔지만 결코 우아해 보이지도, 어떠한 격식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이를 카운팅하고 싶지 않다는 30대 초반(이라 믿고 싶어 하는)의 그 둘의 대화는 잠시 정치로 흘러갔다.

바로 오늘 아침 '주독일대사관 재외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나에게도 도착한 '제19대 대통령 선거 재외투표 안내문'에 관한 메일 때문이었다. 거의 풍비박산이 난 대한민국에 찾아온 금쪽같은 기회가 내포된 선거인지라, 그들의 대화가 궁금해졌는데 웬걸. 그들의 첫마디는 '뽑을 후보가 없다'였다. 이렇게 회색분자 같은 사람들은 어떤 선거에나 있다는 걸 안다. 그 후에 덧붙인 '그나마'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이 내가 지지하는 후보와 같았음에도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외국민, 혹은 국외부재자 투표를 신청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독 정치에 취향과 소견을 내세우기 겸연쩍어하고, 이를 유난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본인을 예술가라고 생각한다면 무조건 '찍을 후보가 없다'라거나, '트럼프가 낫다'라고 (농담이라 할지라도) 말하는 가벼움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본인들의 예술에 심어놓은 철학이 과연 얼마나 깊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타지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한국인의 얼굴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나도 그저 인스타그램에 중독된 여성으로 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Maybe something good waiting for you'라는 남자친구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들어맞은 하루였다. 이곳에서 베를린 힙을 마주할 준비운동 없이 미테에 갔으면 억울했을 것이다. 우연 투성이였던 하루에 발견한 우연 같지 않은 문장으로 오늘의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Liebe ist das Selbstopfertum. Dies ist das nützliche Glück, das nicht von der Zufälligkeit abhängig ist."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익한 행복이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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