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은 Apr 12. 2017

[베를린 살이] Hohl

속이 빈, 공허한

오늘의 계획은 아주 명확했다.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 1시마다 열리는' 런치 콘서트를 볼 것 → 점심을 먹고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을 갈 것> 베를린에 도착하고 맞은 역대급 비바람과 추위였지만 전날 이미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마음을 다잡았던 터라 의연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포츠다머플라츠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시작은 좋았다. 아니, 시작부터 나빴던 걸까. 런치 콘서트를 기다리며 스타벅스에서 모닝세트를 시켰건만, 세트 메뉴의 크루아상이 떨어져 나는 커피값만큼이나 비싼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시키고 말았다. 샌드위치라면 이미 아침에 손수 만들어 먹고 왔는데 말이다. 웬만하면 외식을 다채롭게 즐기면서도 식비를 줄이고자 장을 본 거였는데, 이런. 그래도 베를린에서만 만들 수 있는 스타벅스 카드를 손에 쥐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짭조름하고 달콤하기까진 한 샌드위치를 맛보고 났을 땐 좀스러운 기분이 완전히 가셔버렸다. 그래서 다시, 오늘도 우연으로 인해 시작이 좋구나-라고 생각했더랬다. (참, 베를린 스타벅스에서도 카드 충전의 최소 금액은 5유로다.)

책을 읽으면서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겨우 150페이지 남짓한, 그것도 여백이 아주 많은 이 책을 베를린행 비행기에 탔을 때부터 오래도 붙들고 있었다. 생에 가장 긴 독서가 아니었나 싶다. 친구의 엽서를 책갈피 삼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외줄을 타고 있는 엽서 속 저이가 꼭 이곳에서의 나 같아서 몇 번이고 위로받았다. 넘치는 고마움으로 못다 한 페이지를 마저 다 읽었다. 친구의 말마따나 내 여행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는 이 책, 꼭 비종교인을 위한 잠언집 같다. 속이 꼬일 것 같은 날이면 주저 않고 다시 펼쳐봐야지.




Die Schone und das Biest (Beauty and the Beast). 필하모니 런치 콘서트의 오버부킹으로 (다행히 출혈 없이 무사히 퇴장하고) 호기롭게 소니센터 건너편 시네마 박스로 영화를 보러 갔다. 심지어 영어 자막도 없는 독일어 더빙으로다가. 소싯적 디즈니를 섭렵하던 짬으로 스토리를 곱씹으며 미녀와 야수의 화려한 영상미를 즐겼다. (등장인물들의 디테일한 감정선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했지만) 이때부터였을까, 몸도 마음도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게.




베를린의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날선 마음도 잠시나마 잠잠해진다. 다행히도 영화를 보고 나니 날이 개어있었다. 과연 베를린의 날씨는 그날 정오가 지나야 정확히 알 수 있구나. 내 기분도 마찬가지고. 모두가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돌아간 영화의 결말 때문이었을까, 오전에는 뒤틀리기 바빴던 마음이 이번에는 순식간에 공허해졌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고 속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참으로 유난스러운 감정기복이구나, 조소하기에도 지친다 이제는) 하늘은 다시 제 얼굴을 찾았는데, 나는 이렇게 계속 기분이 까라지면 안 될 것 같아 시네마 박스 옆에 위치한 포츠다머플라츠 내 쇼핑몰 중 하나인 아르카덴(Arkaden)으로 넘어가 윈도쇼핑으로나마 시간을 축냈다.

오늘의 안티 스트레스를 도운 흰 티셔츠와 컬러들. 이 중에 하나를 데려왔다.




다시 찾은 포츠다머플라츠에서부터 브라이텐바하플라츠까지 무사히 귀가했다. 한국에서는 옷 쇼핑을 거의 안 하는 편인데, 이곳에선 한국어로 된 책이나 잡지를 살 수가 없으니 오늘처럼 기분이 발끝에 달린 날이면 결국 이런 걸 품에 안고 돌아온다. 삼일 동안 내가 산 옷과 액세서리들. 한국에서는 세 달 동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긴 여행을 떠나와보니,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라는 유명한 여행책 제목에 매일 공감하게 된다. 이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 조차 없을 감정이다. 여행을 등한시했고, (본인의 여행할 수 없는 환경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여행자들을 은근히 무시해왔던 내가 여행을 통해서야 비로소 나를 재발견하게 되다니. 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경이로운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다니. 나는 28살이 아니라 꼭 18살로 돌아간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더욱더) 예민해지고, 바뀌어가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이 여행이 새삼 두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베를린 살이] ein Zufall!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