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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13. 2017

[베를린 살이] Einladung

초대, 초청, 초대장

집 근처에서 아직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중이다. 매일 같이 지나가는 길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여전히 신선한 감각을 얻는 건 당연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덩그러니 피어 있는 길가의 분홍 튤립 한 줌과 역으로 향하는 신호등을 건너자마자 보이는 밑동만 남은 나무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나는 오늘에서야 발견하게 됐다. 고마운 아침이었다.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드디어 미테(Mitte) 입성! 이제 보름 동안의 게으른 관광객 모드를 벗고, 본격적으로 로컬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3일간 베를린의 중심부, 미테를 살펴볼 예정이다. 날은 흐리지만 언제나처럼 꽃길을 걸으며 미테에 진입했다. 아마 나는 훗날 베를린을 '노란색'으로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베를린의 지상, 지하 어디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노랑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매일 지하철을 탈 때, 무심코 거리의 화단과 카페를 볼 때.




미테에서 제일 처음 들린 곳은 단연 <두 유 리드 미?!>. 나에게 없는 히어로와 어나더 맨을 만났다. 미테에서 보내는 첫날의 첫 번째 코스로 Do you read me?!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에코백이 주목적이었지만, 한국에서 유일하게 가져온 책을 다 읽어버린 나는 그나마 내가 읽을 수 있는 활자로 된 책을 찾기에 나섰다. 마침내 영어로 쓰인, <Mind>라는 제목이 잡지와 (혹시 모를) 독일 아티스트들과의 대화를 위한 언어&기호를 영어로 풀어낸 책을 샀다. 5유로의 시그니처 에코백은 물론이고. 여기에서만 26유로를 써버리고 나니 벌써 오늘 할 일을 다 마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독일어만 아니었으면 200% 샀을 인터뷰지. 인물 사진들이 참 좋았다. 영어와 독일어가 번갈아 쓰이며 완성된 인상 깊은 표지의 책도.

Do you read me?!

Yes, I do.


※ <Do you read me?!>는 구글에 상호를 그대로 입력해도 주소가 나오지만, 정확한 주소와 부수적인 정보는 다음과 같다. 

Auguststr. 28 (str.=strasse(길)의 줄임말) / 월~토요일 10:00~19:30 / @doyoureadme_berlin




가격과 상관없이 근사한 기분으로 즐긴 점심. 베를린을 대표하는 주상 복합 아파트 하케셔 회페(Hackesche hofe)에서 발견한 스몰 뷔페 같은 음식점. *하케셔 회페는 베를린의 중정을 대표하는 구조로, 다양한 문화를 소비하는 컬처 컴플렉스 정도로 보면 되겠다. (단순 쇼핑몰이라고 하기엔 구조가 특이하니까) 아무튼, 이름을 잊은 이 식당은 베이커리를 겸하고 있는 곳인데, 베이커리를 제외한 식사류는 그람 수 대로 차지가 된다. 사실 이런 곳을 동네 쇼핑몰 1층에서도 발견한 적 있는데 먹어본 건 처음이다. 
날아다니는 쌀에 돼지고기가 들어간 커리와 왠지 상큼(?)할 것만 같은 치즈를 주문했다. 음료로는 작은 샴페인을 골랐고, 치즈가 맛있으면 반 정도 남겼다가 빵을 주문할 요량이었는데 결국 주문하게 됐다. 사진엔 없는 빵까지 총 11.42유로. 베를린이 낭만적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물가. 가난한 여행객이라도 결코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곳에서 셀카도 찍고, 그래머 인 유즈도 안 뗀 주제에 세미(?) 독일 문법책을 훑어보며 느긋한 식사를 즐겼다.

Welcome to Luiban Papeterie(루이반 파페테리) - Stationery shop! 

밥을 먹고, 베를린에서 가장 멋진 문방구 중 하나라는 루이반 파페테리에 들렀다. 스테이셔너리 숍 말고, 문구점도 아니고, 역시 '문방구'라고 해야 제맛이다. 단순히 문구를 파는 숍이 아니라 흡사 갤러리 같았던 이곳. 나는 문구 덕후는 아니지만, 루이반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어제 시달린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랑해지고…. 
루이반 파페테리에는 일본 및 유럽 각지에서 공수한 감각적인 아이템들이 많은데, 이왕 베를린에 왔으니 출처를 확인한 뒤 가급적 독일 제품을 구매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나는 여기에서만 3만 원 정도 썼는데(...) 인기 아이템이라고 들은 100% 구리로 만들어진 포장용 테이프가 제일 마음에 든다. 위 사진에 찍힌 색연필 샤프(!)와 그립감이 좋은 가위도 정말 사고 싶었는데 그럼 10만 원이 넘었을 거다.

고양이 클립이 모션 별로 믹스돼 있는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욕심).

루이반의 카운터. 주인아저씨는 포장을 마치고 저렇게 예쁜 테이프로 봉해준다. 루이반 전경이 담긴 엽서 같은 큼지막한 명함을 챙기고 나왔다. 

3만 원의 흔적(뿌듯). 바로 위 단락에서 made in Germany 제품을 권장했으면서 정작 made in Japan 풀을 사버린 나. 물풀이라니, 그리고 저렇게 큐티하고 콤팩트한 사이즈라니... (심지어 종이에 바르면 형광 녹색으로 발색(!)된다) 왜놈들의 디테일이란. 나머지는 모두 마데 인 절머니. 은색 연필(색연필이라기엔, 연필과 같은 필기감이다)은 내 인스타그램 닉네임을 닮아 끌렸고, 본격적인 베를린에서의 단상을 손으로 정리할 작은 수첩(Projekt notes no.1)과 두 개의 마스킹 테이프를 샀다. 반짝이는 놈이 바로 그 잇템 'Kupfer-Klebeband(쿠퍼크레베반드)'다. 7유로 정도 했던 것 같다. 

※ 문구 덕후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여행지에서의 의미 있는 선물이나 기록을 남기고 싶다면 루이반 파페테리에 들를 것을 강력추천한다. 비슷비슷한 여행 루트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이곳은 개인적으로 역 이름이 예뻐 좋아하는 곳(로ㅈ사-룩ㅈ셈부르크) 근처에 위치해 있다. R
osa-Luxmburg-Str. 28 / 월~토요일 12:00~20:00 / @luibanberlin




cafe filter / This is so around the corner. 

다시 돌아온 하케셔 회페. 어느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카페, filter를 찾았다. 보난자(Bonanza)의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아쉽게 오늘은 솔드 아웃되어 기본 메뉴를 시켰다. (미테의 카페에서 1.80유로라니 말도 안 돼) 지금까지 베를린에서 마신 커피 중 제일 맛있었는데 제일 저렴했다. 늘 그렇듯 사진에 전부 담기지는 않(못하)지만, 아담한 공간에서 풍겨지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잔을 연속으로 시켜 먹었다.

*참, 유럽 여행객들에게 있어 서비스의 품질을 좌우하는 화장실과 와이파이 제공도 훌륭했다. 주인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카운터에 있던 언니가 상당히 친절했는데 볼일이 급해 이곳(구석)까지 들른 남성에게 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하도록 해줬다. 

이건 너무 귀여워서 보너스 컷으로! 카페 필터에서의 심신 안정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커피 탓인지 잠도 안 오고. 루이반에서 산 것들을 하루라도 빨리 소진해버리고 싶어 이것저것 자르고 붙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디에서든 스크랩할 거리와 풀(또는 마스킹 테이프)만 있으면 외롭지 않구나. (집중력 강화에 최고시다) 덕분에 프로젝트 넘버 원 수첩을 벌써 4장이나 채웠다.




베를린에서의 방콕 꽃놀이. 꽃나잇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는 소식과 인스타를 통해 본 한국은 완연한 봄이다. 베를린도 봄이긴 한데, '초봄'과 '완연한 봄' 사이의 경계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고 있다. 이곳은 벚꽃 대신 목련나무가 즐비하고, 개나리와 튤립이 눈에 채인다. 올해의 봄은 지금껏 한국에서 만끽한 봄보다 조금 더 다채롭게 채워질 것 같다. 더 많은 컬러, 더 많은 감정, 더 많은 날씨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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