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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14. 2017

[베를린 살이] Notruf

구조를 청하는 외침, 긴급전화

미테만 중점적으로 둘러보는 두 번째 일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day 2가 아니라 1과 ½ day다. 이날의 계획했던 일정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은 무려 12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 회상하는 어제의 일기이다. 미테 day 2의 계획은 다소 원대(?)했다.

첫날에 <두 유 리드 미?!>를 시작으로 하루를 열었던 것처럼, 이날도 프로쿠엠(Pro-Qm) 책방에서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이후 바로 근처에 있는 루이반 문구점에서 어제 깜빡 잊은 지우개를 산 뒤) 그리고 자꾸만 방문을 미뤄두었던 가먼트 세컨핸드 숍(only for woman)에서 눈요기를 하고, 베를린 버거 인터내셔널(BBI)과 함께 베를린의 3대 버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 있다는 시소버거(SHISHO BURGER)를 먹는 것까지가 오전부터 점심시간 사이의 일정이었다.

이에 비해 본격적인 오후 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독립예술기관인 쿤스트베르케 베를린(Kunstwerke Berlin=KW)과 카페 뫼더(Morder=살인자)에서 밤 사이 방전된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돌아오면 좋을 것 같았다. 미테에 할애한 3일 중 중간 날인만큼, 남은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기 위해 나름 야무지게 머리를 쓴 코스였다.

*참새의 방앗간. 나는 이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도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가격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런데 그만, 프로쿠엠에 도착하기도 전에 몸에서 이상신호를 느끼기 시작했다. 주제에 멋을 부린다고 새로 산 스카프를 어서 개시하고 싶어 그에 어울리는 컬러의 반팔 티셔츠에 봄 재킷을 (여기도 지금 봄이긴 하다) 걸치고 나왔는데, 두 번 묶은 스카프가 미테에 도착해 있을 때에는 이미 헐렁거릴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부는 날씨였다. 아무리 그날 정오가 지나야 알 수 있는 베를린의 날씨라지만, 오전 하늘의 얼굴이 너무나도 험악해 그새 오한이 들고, (이날 나보다 얇게 입은 베를리너를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아파졌다. 이대로 일정을 감행한다면 200% 감기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점심까지는 먹고 들어가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내 기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옷깃을 여미고, 목 언저리가 적당히 드러날 수 있도록 모양을 잡아맸던 스카프를 단단히 두른 뒤 지도를 보며 걸었다.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름을 느꼈다. 하필이면 볼터치도 빡세게 한 날인데, 그때 내 얼굴을 봤다면 분명 가관이었을 거다.

*오늘 찍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


보물을 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카드를 챙겼지만 가먼츠도, 어제와 같이 마음 놓고 구경을 하려던 루이반을 주저 없이 건너뛰고 오직 시소버거를 향해 직진하던 길이었다. 그 사이 잠시 해가 떴(지만 바람은 여전했)고, 나는 예쁜 벽화로 손님을 맞이하는 또 다른 문구점과 우연히 맞닥뜨렸다. 영수증을 챙기지 않아 이름을 까먹은 이곳에서, 베를린에서 구입한(할) 문구용품을 담을 필통을 샀다. 어딘가 빈티지스러운 프린트와, 필통을 구성하는 재료의 95%가 재활용 소재라는 소개에 7유로를 지불했다. 저렴한 가격의 프라이탁을 사는 기분으로 말이다. 실은 책 사이에 얼굴을 절반만 드러낸-앞머리가 마구 휘날리는-여성이 꼭 내 모습 같아 보인 기분도 한몫했다.




*힙한 음식점. 아직 힙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컨디션 때문인지 벌써 이곳의 힙스러움에 질린 기분이었다. Auguststr. 29 10119 Berlin Mitte


미테의 핫한 수제버거집, 시소버거. 딤섬을 담아내는 나무 상자에 햄버거를 서빙한다. 와규 패티는 물론, 불고기버거 메뉴가 따로 있고 사이드 메뉴에는 무려 김치가 적혀 있는 동북아시아 3국의 정체성이 고루 섞인 이곳. 외국인들이 환장(?)할 만하다. 막상 방문해보니 나는 생각보다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조한 컨디션 때문이리라 믿으며 나중에 한번 더 와볼 생각이다. 시소버거에서 가장 비싼 메뉴에 고구마튀김과 맥주를 추가로 주문할 생각에 들떴던 아침은 어디로 가고, 나는 아래 사진과 같이 기본 치즈 버거에 김치를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진짜 무식해 보이는 결정인데, 김치를 먹으면 몸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치즈 버거와 김치의 궁합이 잘 맞아 놀라기도 했다(변명).

나는 이곳에서 콜라도, 물도 시키지 않고 꾸역꾸역 점심을 해결했다. 찬 음료를 마시는 순간 목감기에 걸릴 것만 같은 강박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아 거의 입구에 앉아 먹었는데, 착석을 기다리는 줄이 바로 내 등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거니와 사람들이 오가는 통에 찬기가 수시로 목덜미를 강타하는 바람에 지금 생각해도 체하지 않은 게 용할 따름이다.

*시소버거에서 생강차로 이어지는 기이한 식사


참, 버거는 정말 맛있었다. 3.50유로나 주고 주문한 김치는 거의 잘 익은 한국 김치의 맛이었고, 다소 작아 보이는 크기의 버거는 의외로 웬만한 위를 가진 성인 여성의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속 재료들이 신선해 보였고, 식감이 좋았고, 이곳의 번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일전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베를린 수제버거들의 특징은 과연 패티가 아니라 (패티는 기본적으로 훌륭하다) 바삭하면서도 촉촉하고 적당히 기름진 번인 듯하다. 소니센터 1층에 위치한 햄버거 집도, 짐블록 버거집에서도 같은 기분을 느꼈으니 말이다. *짐블록 버거와 더불어, 시소버거 역시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최소 두 번씩은 더 방문할 의사가 있다.

시소버거를 먹고, 바로 맞은편 골목에 위치한 커피 맛으로 유명한 카페, 더 반(The Barn)에서 따뜻한 커피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여기에 개인적인 취향으로 두 유 리드 미?!까지 엮는다면 이 아우구스트슈트라세에서 단 5분 동선으로 알찬 미테 관광을 할 수 있다) 나는 여기가 매거진 B에 소개된 The Barn '로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더 반의 초기 모델로, '슈퍼 스몰 커피 스토어'라는 애칭으로 불린 곳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숨 쉴 틈이 있는 넓은 더 반 '로스터리'였는데….

그쪽 주소는 미리 알아오지 못해서 나는 오리지널 더 반 옆에 위치한 카페로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생강차를 리필해 마시며 오장 육부를 데운 뒤 오후 3시가 막 넘었을 무렵, 집으로 돌아갔다. 베를린에서 나를 스쳐간 이들 중 눈동자가 가장 푸른 청년이 손수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적어 주었고,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먼저 뜨거운 물을 채워주었던 카페. 청년에게 직접 팁을 주고 싶었는데, 주인아주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가져갔다. 식사 주문을 주로 받는 레스토랑이었으므로, 언젠가 피자와 화이트 와인을 마시러 다시 오고 싶다. 바로 옆 건물에는 무료로 개방되어 있는 Gallery Mojavari까지 있음을 확인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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