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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20. 2017

[베를린 살이] Danke Schön

고마워

비 오는 화요일, 헌책방에 들렀더랬다.

아쉽게도 한국어로 된 소설이나 시집, 잡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독어사전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 살 걸 그랬나) @Albrechtstr. 111 12167 Berlin-Steglitz

*헌책방에서 건진 재즈 LP 판과, 헌책방 가는 길에 이미 건진 빈티지 재킷, 그리고 가장 먼저 품에 안았던 장미&안개꽃


비가 내렸던 화요일. 뭐, 언제라고 비가 안 내렸냐만은- 이번 주 화요일은 유독 '비 내린' 화요일로 기억된다. 비 냄새를 많이 맡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스테글리츠를 떠나기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조급했던 날이기도 했다. 부활절 휴일을 핑계 삼아 5일 동안 동네에 머물렀지만, 같은 이유로 동네의 작은 상점들은 문을 닫은 탓에 프랜차이즈 카페만 전전했던 날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월요일 같은 화요일, 벼르고 있던 헌책방에 들렀다. 온몸에 비 냄새를 잔뜩 묻히고는 눅눅하고 오래된 책 냄새까지 더할 요량이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쓰인 책을 전시한 칸은 따로 있었지만 아쉽게도 한국어 책을 위한 칸은 없었다. 그나마 취급하는 책이라곤 한/독어사전뿐. 주저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기념으로 갖고 있었다면 좋았을 뻔했다. 그렇다고 다시 가기엔 뭔가 지는(?) 기분이고. 그래도 책 대신 LP 판을 산 건 잘한 일 같다. 물론 한 달이 넘어서야 듣게 될 타국의 재즈. 나는 베를린의 음성을 이 음반으로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참, 아침부터 꽃을 사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꽃다발을 안고 스테글리츠 일대를 활보했다. 도중에 비가 내려 꽃은 꽃집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내내 촉촉했다. 장미엔 역시 안개지, 라고 꽃을 골랐지만 실은 지나치게 통통(?)한 안개꽃의 자태에 홀려 장미를 선택했다. 이렇게 생기 있는 안개꽃을 나는 처음 본다. 이곳에서 즐기는 마지막 꽃놀이가 덕분에 화려해졌다. 

4.98유로의 꽃다발, 3.50유로의 LP 판, 그리고 50센트(!)의 빈티지 재킷. 도합 10유로가 채 안 되게 즐긴 이날의 무드. 남은 날들을 잘 다독여줘.




WE ♥ US / I AM U / I ♥ ME

그리고 수요일이 찾아왔다. 수요일을 한 주의 중간, 'Hump day'라고 했던가. 주의 절반이나 지났지만 주말까지 또 절반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편, 어느새 스테글리츠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의 절반이 지나가버린 나는 더 이상 동네에 붙어 있을 이유가 사라져 버렸고- 어디로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어젯밤부터 나를 채근했더랬다. 동네를 벗어난 나의 마지막 여정은 바로 미테. 미테 한복판에서 불현듯 몸과 마음이 앓아버렸던 기억이 그새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는지 새로운 길을 나서야만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몸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그래도, 일찍이 계획했던 미테에서의 일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테를 건너뛰고 다른 도시로 가는 건 계획병자인 나에게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랬다가는 애꿎은 곳에서 또 다른 트라우마를 만들어서 돌아올 사람이다 내가. 실로 나는 베를린에서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또 간사한 인간인지 몸소 느끼고 있다. 어쨌거나, 그런 주제에 이미 두 번째 숙소비용도 결제했기 때문에 나는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베를린의 중심으로 다시금 뛰어들었다.

쿤스트베르케 베를린(Kunstwerke Berlin) 도착! @Auguststr. 69, Mitte, 10117

이곳은 젊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기관들의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는 독립예술기관으로 보면 된다. 베를린 비엔날레를 주최하기도 했단다. 베를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실험적인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소개에, 나의 미테 여정의 한구석을 차지한 곳이다. 나는 독일어뿐만 아니라 물론 영어도 무지한, 특히 현재 전시 중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한 여행자에 불과하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다. KW(쿤스트베르케 베를린)에서 전시 중인 두 명의 아티스트 중 한 명의 전시가 바로 '쓰기의 기능'에 관한 전시였기 때문이다. 

얕은 독해력으로 전시를 0.1% 이해하곤 뛸 듯이 기뻐했던 순간
If the function of writing is to 'express the world'...로 시작하는 전시 해설서의 한 문장이 너무 인상 깊었다.

그래서 남은 수백 개의 문장을 일일이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의외로 무모한 열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칠 수 없었던 KW의 에코백과 또한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예뻤던 KW 옆 건물의 자태


불과 며칠 전에 친구와 90년대의 영광을 찬양했지만, (90년생인 우리들은 90년대에 우리가 성인이었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이 에코백의 당찬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우리는 우리를 넘은, 그 이후의 세대를 바라봐야지. 나는 KW를 넘어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다.




'살인자'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 뫼더(Morder). 이름과 달리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에 웃음이 났다. 다음에도 들릴 의향이 있는데, 그땐 꼭 저 니베아 자판기를 이용해봐야지! @Torstr. 199, Mitte, 10115

눈이 번쩍 뜨였던 블랙커피와 살라미 샌드위치. 정말 고소하고 맛있고, 또 저렴했다. 덕분에 KW 전시 중 한 섹터의 해설지를 마음 놓고 (야매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긴 시간에 걸쳐 해석을 마치고도 카페를 떠나기는커녕 동네에서처럼 사색에 빠지고 말았는데, 아마도 나는 장기 여행자이기 때문에 여행지에서도 이처럼 배부른 우울과 상념에 빠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순간이 얼마나 과분하고 감사한 지 깨달으라고 온 우주가 내게 외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최근에 완독을 마친 소노 아야코 선생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에서 발견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실 나는 두려움을 핑계로 5일 동안 스테글리츠에 머물렀고, 그 시간을 내 인생에서 또 한 번의 '틀린 연습'으로 보내고 있는 걸까 봐 미테로 나온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마을버스가 아닌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말이다. 이곳에서조차 내 감정에 빠져 '틀린 연습'에 매달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나에게 정말 잘했다고. 고맙다고 또 섣불리 칭찬해주고 싶었다.

만약 내가 이 여행을 한 달 기간으로 잡았다면, 나는 곧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상황이라 가정하고 생각해보았다. 며칠 후 이곳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도 아쉽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글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내 새로운 모습이라곤 놀라울 정도의 나약함과 약간의 부지런함뿐인데.




도합 200유로가 훌쩍 넘었던 맨투맨들. 피팅까지 했지만 사지 않(못)았다.

하지만 엄마에게 선물할 백팩은 무조건 좋은 걸로다가. 매장에서 확인하고 인스타그램까지 팔로했다. 엄마 마음에 쏙 드는 백팩을 선물하고 싶다. 매일 아침 그녀가 받아보는 베를린 소식만큼 맑고, 밝은 기운들로만 가득 채워서. 구름과 비와 내 상념은 이곳에만 남겨두고 말이다. 나는 60이 다 되어가는 그녀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다. 아니, 내가 그 희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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