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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24. 2017

[베를린 살이] Freiheit Berlin!

자유, 베를린!

실화 맞는지 의심스러웠던 토요일 오전. 베를린의 오전은 보통 흐립니다. 일찍 일어나서 기분 상한 중학생 같은 얼굴이랄까.

스테글리츠에서의 마지막 주말이 밝았다. 과연, 의심스러운 아침이었다. 이날도 부지런히 나갈 채비를 하는데- 꼭 지난주 부활절의 주말처럼 헬무트가 나들이 동행을 제안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농장 체험학교? 즈음 되는 곳을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마침 며칠 전부터 그의 오랜 친구와 친구의 딸이 옆방에 머물고 있던 터였다.
이곳에서 나는 유독 거절을 모른다. 특히 베를린이 내게 묻는 질문에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오케이로 일관하고 있는데, 돌이켜보면 끈질기게 안정적인 삶을 유지해온 습성으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매일은 언제나 일말의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이 내 통제 밖에 있으니까.

*동화책 같았지. fairy tale book 이라 말하는 내 발음이 좋지 않았는지 헬무트가 못 알아들어 결국 칠드런 북이라고 설명한 나. @Umwelt-Buildungszentrum Berlin


이곳을 둘러보면서 나는 아마도 내가 베를린에, 그것도 서베를린에 다시 온다면 그땐 분명 부모님과 함께일 거라고. 서베를린의 널찍한 자연풍경을 그들과 너무 늦지 않게 나누고 싶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엄마와 아빠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지만, '가족'이라는 집단에는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어쩐 일인지 엄마와 아빠를 개별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저 '우리 가족'으로 감싸 안게 된다. 이곳의 유유자적한 풍경은 잠잠하던 철륜을 아주 절절하게 상기시킨다. 지금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다.

토요일 오후의 햇빛을 잔뜩 받은 이날의 점심. GM 26과 이별해야 하는 건 좀 아쉽다. 동네카페가 주는 위안을 베를린에서도 체감한다.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Hamburger Bahnhof Museum)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옛 역사를 복원해 세운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보정 없이도 힙한 색감에 흠칫

30여 개 가까이 되는 전시 섹터의 방대함에 걸음을 옮기고 장막을 걷을 때마다 오감이 수십 번씩 깜빡거렸다. 하지만 사진으로는 10분의 1도 담을 수 없고,  담기지 못한- 반짝였던 순간들을 극히 일부 소개한다.




본격적인 감상에 앞서, 아트 서적을 위주로 취급하는 미술관 내 서점 겸 기념품 숍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입장료를 제외하고 4만 원 가까이 썼는데, 당분간 박물관/미술관은 물론 기념품 숍도 당연 금지다. 거덜 나겠어 아주. 무엇보다 수화물 오바되면 옷 버릴 거냐고요... 돌아가서 얼마나 대단한 독서를 하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는다면, Yes that it will. 실로 행복이 여기 있었는 걸요?

<Don't Talk, Just Kiss>라는 책을 무작위로 펼쳐보았습니다.

굿즈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1인

포스터 대신 자석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루이반에서 산 수첩을 벌써 거의 다 써가, 베를린에서의 두 달차 일상기록을 책임질 장비(?)를 미리 구입했다.




OK, Take a rest. 또는 I wanna take a rest. Umm OK!

전시뿐만 아니라 전시장을 구성하는 구석들에게도 마음을 빼앗겼다. 찍고 나서 꽤 흡족했던 두 사진 모두 공교롭게도 비상구라니. 여전히 내게 가장 필요한 사인인가 보다.

2n년 만에 마침내 텔레비전에 나왔다. 엄마와 함께였음 좋았을 전시 섹터

엄마, 나 좀 봐.
이럴 수가, 관람 중 한국인 안내원 발견! 그 분이 귀띔해준 숨어 있던 영상 전시. 감사합니다. 선물 같은 선율이었어요.

그리고 이 연주를 마지막으로 3시간 동안 머물렀던 미술관을 벗어났다. 14유로가 아깝지 않았다.




이날 내가 만난 상설 전시들은 전시 기간이 긴 탓에,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것 같아 미리 작별 인사를 해두고 왔다.

당신의 마음엔 벽이 없습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다. 다시 흐릿해지지 않도록 오늘의 그림을 잘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지금의 일상에서 느끼는 감동을 한국에서도 재현할 수 있게, 돌아가서도 근사하게 살고 싶어졌다. 다시 떠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엄마도, 아빠도. 하루의 끝에 다다르고 나니 문득 이곳에서 나 좋은 걸 먹고 보고 사고 하는 게 미안해졌다. 미안한 감정을 넘어서 좀 사치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 삶의 감동을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화려하지 않아도 예전보다 더 근사한 일을 하고, 당연히 돈을 벌고, 종종 아깝지 않다는 듯 쓰고, 아니 이 같은 소비 없이도 가능한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 말이다.

어렵겠지만, 노력하고 싶다. 눈앞의 안녕 대신 근본적인 행복을 찾고 싶다, 가닿고 싶다. 결국 돈 문제 아닌가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음... 감히 마음의 문제라고 답하고 싶다.

"돈 걱정은 그동안 너무 많이 해서요, 그리고 그렇게 만성 편두통처럼 시달려 보니 그나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돈보다는 마음이더라고요. 생활의 안정을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정작 마음은 필연적으로 지치기 마련이니까. 돈 말고 마음을 먼저 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돈은 쓰면 쓰는 대로 없어지지만, 물론 그건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바닥나지 않도록 나를 지킬 수 있는 삶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야 살맛이 좀 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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