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은 Apr 26. 2017

[베를린 살이] Es ist weg

사라지다

3월 29일 밤부터 4월 24일 낮까지 머물렀던 베를린 스테글리츠(Steglitz)에서 숙소를 옮겼다. 베를린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은 서울보다 크니까. 하긴, 나는 아직 서울도 제대로 다 알지 못하니까. 베를린에 조금 더 알짱거려도 괜찮겠지. 나의 두 번째 베를린은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이다. 스테글리츠가 서베를린이었다면, 프리드리히샤인은 동베를린으로 보면 되겠다. 이상이다. 베를린에 한 달 가까이 지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기로는 처음 스테글리츠를 선택했을 때와 마찬가지다. 다만 베를린의 중심, 미테(Mitte)와 근접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었다. 
그리고,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스테글리츠의 마지막 밤이 드리워졌다. 처음 짐을 풀던 그밤처럼, 짐을 다 꾸린 마지막 밤에도 이토록 눈물이 날 줄 몰랐다. 처음은 두려워서였고, 마지막은.. 마지막도 두려워서인 것 같다. 처음은 처음이 두려워서, 마지막은- 이 마지막이 끝나면 다시 또 처음이 기다리고 있어서겠지. Anyway- Auf Wiedersehen, Steglitz.

Good morning, Neu Banhof!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고, 무엇도 묻지 않는 이곳에서는 밤이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아진다. 나를 제일 못마땅해 하는 건 아마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를 제일 안쓰러워하는 것도 나뿐이고. 넌 어때?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넌
난 늘 생각해 난 늘 생각해야 해
이제 그만 지겨워

그리고 프리드리히샤인에서의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음악이 좋아서 다시 돌아왔다. 역사 안 매점이 좋지만 아무래도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는 개인 카페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Frankfurter Allee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e) 입장! 매주 화요일 1시마다 무료로 열리는 런치 콘서트 선착순 인원에 들었다.


비 오는 화요일 오전. 까닭 없이 장미가시 같은 마음을 싸매고 포츠다머 플라츠 역으로 향했다. 도무지 새 동네와 눈인사를 할 마음이 일지 않아, 몇 주 전 선착순 입장에 들지 못해 마음을 접었던 베를린 필하모니 런치 콘서트를 다시 노려보았다. 사실 이마저도 기대되지 않았다. 그냥, 이상하게 프리드리히샤인을 좀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늦게 도착한 내게 베를린 필하모니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윽고 아주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재즈 듀오가 선보인 그들만의 무드, 무대
재즈 듀오가 선보인 그들만의 무드, 무대
재즈 듀오가 선보인 그들만의 무드, 무대

사실 이곳에서 감탄할 일은 많아도 홀로 웃을 일은 별로 없는데 오늘은 1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이 미소 지었다. 몸도 좀 흔들거렸던 것 같다. 마음은 한 곳에만 집중돼 있고. 이렇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참 오랜만에 받았다. 베를린 살이 근 한 달 차. 이곳에 와서 행복한 순간이 하나 더 늘었다. 언제쯤 한 손가락을 넘을 수 있을까?

*둘이서 소화한 악기들. 이 작은 무대를 큰 콘서트 홀로 만들어준 그들에게 한번 더 감사하다. / 오늘의 구원 인증



*오늘 내 걸음을 멈춰 세운 컷들. 이런 녹색, 저런 녹색, 그리고 반가운 매거진B. 나의 베를린 가이드

*빈티지 마켓 @Made in Berlin

오늘은 어째 종일 음악과 함께 하는 듯. 빈티지에 일가견이 있는 박여사가 옆에 있었다면 난 틀림없이 이곳에서 그녀의 인생샷을 남겨줬겠지.

*마지막 착장을 저에게 그대로 입혀주시겠어요?




*저는 화장실 천장에 창문이 달린 5층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거실과 이곳에서도 먹고살려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나의 흔적


오늘 우리 아파트 위 하늘은 어제보다 맑았고, 저녁 즈음 집에 돌아왔는데도 거실엔 한낮처럼 햇살이 가득해 괜히 이 집에 머무는 나마저 선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테글리츠에서 며칠간 묵혀둔 빨래를 돌리고, 야채와 소시지 따위를 볶고 있자니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아 또 실없이 웃음이 났다. 이것도 베를린에서의 행복한 순간 목록에 수납될 수 있을까? 아스파라거스와의 궁합은 의외로 베이컨보다 프로슈토다 더 잘 맞음을 발견한 오늘 저녁을 말이다. 

그럼 이만, 잘자요.
작가의 이전글 [베를린 살이] Freiheit Berli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