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다
3월 29일 밤부터 4월 24일 낮까지 머물렀던 베를린 스테글리츠(Steglitz)에서 숙소를 옮겼다. 베를린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은 서울보다 크니까. 하긴, 나는 아직 서울도 제대로 다 알지 못하니까. 베를린에 조금 더 알짱거려도 괜찮겠지. 나의 두 번째 베를린은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이다. 스테글리츠가 서베를린이었다면, 프리드리히샤인은 동베를린으로 보면 되겠다. 이상이다. 베를린에 한 달 가까이 지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기로는 처음 스테글리츠를 선택했을 때와 마찬가지다. 다만 베를린의 중심, 미테(Mitte)와 근접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었다.
그리고,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스테글리츠의 마지막 밤이 드리워졌다. 처음 짐을 풀던 그밤처럼, 짐을 다 꾸린 마지막 밤에도 이토록 눈물이 날 줄 몰랐다. 처음은 두려워서였고, 마지막은.. 마지막도 두려워서인 것 같다. 처음은 처음이 두려워서, 마지막은- 이 마지막이 끝나면 다시 또 처음이 기다리고 있어서겠지. Anyway- Auf Wiedersehen, Steglitz.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고, 무엇도 묻지 않는 이곳에서는 밤이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아진다. 나를 제일 못마땅해 하는 건 아마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를 제일 안쓰러워하는 것도 나뿐이고. 넌 어때?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해 넌
난 늘 생각해 난 늘 생각해야 해
이제 그만 지겨워
그리고 프리드리히샤인에서의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e) 입장! 매주 화요일 1시마다 무료로 열리는 런치 콘서트 선착순 인원에 들었다.
비 오는 화요일 오전. 까닭 없이 장미가시 같은 마음을 싸매고 포츠다머 플라츠 역으로 향했다. 도무지 새 동네와 눈인사를 할 마음이 일지 않아, 몇 주 전 선착순 입장에 들지 못해 마음을 접었던 베를린 필하모니 런치 콘서트를 다시 노려보았다. 사실 이마저도 기대되지 않았다. 그냥, 이상하게 프리드리히샤인을 좀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늦게 도착한 내게 베를린 필하모니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윽고 아주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사실 이곳에서 감탄할 일은 많아도 홀로 웃을 일은 별로 없는데 오늘은 1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이 미소 지었다. 몸도 좀 흔들거렸던 것 같다. 마음은 한 곳에만 집중돼 있고. 이렇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참 오랜만에 받았다. 베를린 살이 근 한 달 차. 이곳에 와서 행복한 순간이 하나 더 늘었다. 언제쯤 한 손가락을 넘을 수 있을까?
*둘이서 소화한 악기들. 이 작은 무대를 큰 콘서트 홀로 만들어준 그들에게 한번 더 감사하다. / 오늘의 구원 인증
*오늘 내 걸음을 멈춰 세운 컷들. 이런 녹색, 저런 녹색, 그리고 반가운 매거진B. 나의 베를린 가이드
*빈티지 마켓 @Made in Berlin
*마지막 착장을 저에게 그대로 입혀주시겠어요?
*저는 화장실 천장에 창문이 달린 5층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거실과 이곳에서도 먹고살려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나의 흔적
오늘 우리 아파트 위 하늘은 어제보다 맑았고, 저녁 즈음 집에 돌아왔는데도 거실엔 한낮처럼 햇살이 가득해 괜히 이 집에 머무는 나마저 선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테글리츠에서 며칠간 묵혀둔 빨래를 돌리고, 야채와 소시지 따위를 볶고 있자니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아 또 실없이 웃음이 났다. 이것도 베를린에서의 행복한 순간 목록에 수납될 수 있을까? 아스파라거스와의 궁합은 의외로 베이컨보다 프로슈토다 더 잘 맞음을 발견한 오늘 저녁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