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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27. 2017

[베를린 살이] Klopfen

두드리다, (가볍게) 치다

*꾸밈없는 아침기록 시작. 물론 언제 귀찮아질지 모릅니다. ex) 플레이팅이 이것보다 더 형편없다던지 머리를 감지 않아 자존감이 하락했다든지.


어제부터 재외투표 기간이 시작됐다. 나는 부재자 신분으로 독일에서 투표를 한다. 생애 첫 대선 투표는 사표가 되었고, 마치 생애 마지막 투표처럼 느껴지는 두 번째 대선 투표는 외국에서 치르게 됐다. 한없이 날이 맑은 날에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되새겨야만 했던 3년이었다. 다행히 희망은 지치지도 않고 이 척박한 나라 곳곳에 끈질기게 스며들었고, 마침내 다시없을 기회가 뒤따라왔다.
조금 다른 말이지만- 외국에 나와 있으면 애국자가 된다는데, 정말이다. 베를린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떠나온 나는, 한국에서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많은 것들을 생각보다 자주 그리워하곤 한다. 그리움은 이윽고 감사로 이어진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없는 소리다. 나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 같은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삶의 기본권을 보장받고 그래도 이만하면 꽤 괜찮은 하루였지, 한 달이었지, 한 해였지, 그런 인생이었지-라고 회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같은 바람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게 아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다양한 부당함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싸워, 사회의 균형을 정당하게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람이 늘어나는 폐쇄적인 사회가 말고,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배부른 소리 말라고 낡은 호통이 만연한 사회 말고….

*독일대사관 1층 대회의실에서 제19대 대통령선거 투표를 마쳤다. 투표하는 날은 내 못생긴 손도 활짝 펴고 사진 찍는 유일한 날!


아침부터 맑은 베를린의 하늘이라니. 드문 광경에 기분 좋은 예감에 잠시 취해보았다. 5월 9일에도 이 같은 기분이 재현되기를. 햇살이 부서지는 거리 위에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한번 더 되뇌었다.

*내 나라는 조금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지만, 태극기는 죄가 없지. 이따금씩 마주칠 때마다 참 단정하고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아침과 저녁을 거의 숙소에서 만들어 먹고, 한 끼에 10유로 이상의 식사를 자제했던 탓에 오늘의 파스타는 지금까지 베를린에서 먹은 것 중 가장 근사한 한 끼였다. (맛도, 분위기도) 투표를 마친 내게, 그리고 근 한 달을 잘 버텨낸 내게 주는 선물 같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소문대로 식전 빵이 훌륭했고, 런치 타임 적용으로 가장 비싼 파스타도 14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양이 많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맛있는 맛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여행 막바지에 또 가야지. 그땐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킬 테야. @Essenza in Postzdamer Platz




*두스만 서점(Dussmann das KulturKaufhasus) @Fridrichstr. Bhf


언젠가 용돈으로 받은 100달러를 환전하러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우연히 두스만 서점을 발견했다. 말은 서점이지만, 실상 문화 백화점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의 교보문고 같은 느낌이랄까? 광화문이나 강남의 교보문고보다 큰 규모를 자랑한다. 베를린 여행을 떠나기 전 방문 리스트에 올려 두었는데- 잊고 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만나니 참 반갑더라. 여행의 묘미란 이런 거겠지? 여행을 앞두고 심각한 길치인 스스로를 타박하고 염려했던 내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걷는 그곳에서 틀린 길은 없을 거야'라고. 그 말이 문득 생각이 나 살짝 울컥했다.

*이들이 가장 반짝이던 순간들. 나는 아티스트들의 리즈 시절은 데뷔 때라고 본다. 음, 물론 성공한 이들에 한해서겠지? 잠시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그리워졌다.


역시나 방향을 잘못 잡아 정문이 아니라 음반 매장 쪽 문을 열고 두스만 서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주한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의 앨범. 요즘 내 메신저 상태 메시지를 조져 놓고 있는 밴드의 앨범을 어찌 그냥 지나치리오. 돌아갈 때까지 책은 다시는 안 사겠다고 다짐했는데, 앨범을 안 사겠다고는 안 했잖아요..? 책보다 가볍고 이렇게 얇은데요. 그리고 이 앨범을 손에 쥐어야만 정말 그 무엇도 나를 해치지 않을 것 같았다. "Nothings gonna hurt you baby."

청음 공간 한 켠에서 멋지게 그루브를 타던 오빠. 사실 더 멋있게 나왔는데 숨겨진 옆모습은 내 휴대폰에서만 감상하기로 했다.

에드 시런의 앨범을 1분 미리 듣기 했는데, 타이틀보다 <What do I know>, <How would you feel>이 제일 좋았다. 묘하게 이어지는 두 노래 제목들, 질문들. 멜로디에 실려오는 질문에 홀로 답하는 거 좋아합니다. 얼굴 말고 귀를 기울이고요.

까맣고 빨간 나, 그리고 두스만. 잘 어울린다(?)




집에 가다 익숙한 역이 보여 무작정 내렸다. @Hackesche Markt

Bubble Bubble~

예전에 하케쉐 훼페(Hackesche Hofe)를 여기 하케쉐 마크트(Hackesche Markt) 역이 아닌 미테의 다른 역을 통해 방문했었다. 두 스만에서의 서점 놀이를 마치고 생각보다 일찍 프리드리히샤인으로 돌아가는 길, 왠지 낯익은 역 이름을 보자마자 직감을 믿고 내렸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하케쉐 마크트 광장에서 마주한 비눗방울 퍼포먼스. 참 언제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 38살에도, 58살인 엄마도, 98살에도 아마.

따뜻한 건물에 등을 기대고 '청키 피넛'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가만 보니 여기 사람들은 맥주만큼이나 아이스크림을 사랑하는 것 같다. 테라스가 딸린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이들의 테이블 위에는 맥주 반, 아이스크림 반.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컵이나 콘을 들고 있는 모습은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작은 스푼과 소복한 아이스크림이 눈에 아른거린지 꽤 됐던 터였다. 이유 없이 아이스크림 먹기를 미루고 있던 나를 하케쉐 훼페 입구에 나 있는 아이스크림 집이 붙잡았다.


아이스크림, 의외로 혼자 먹어도 별로 안 쓸쓸하구나? 새까만 커피랑 다를 바 없네. 네가 지닌 얼굴색이 너무 많아서 괜히 겁먹었어. 나는 어떻게 먹어야 하나~ 하고. 하지만 여전히 너는 커피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느낌이야. 커피를 마실 때면 내가 잠시 세상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드는 기분인데,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세상 한가운데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같거든. 나 좀 보라고, 참 행복하다고.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적당한 때였던 것 같아. 좋아!

오늘의 마지막 인사는 암펠만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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