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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28. 2017

[베를린 살이] Erfassen

1. [비유] 납득하다, 이해하다 2. 붙들다, (붙)잡다

미에르 월넛 크림과 산딸기 잼이 거들고 있는 요즘 아침

아침에 눈을 뜨고 오늘이 수요일인 줄 알았는데 목요일이었다. 새삼 시간이 빠르다고 느껴지면서 잠시 마음이 조급해졌다가, 아직도 5월이 채 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금 허탈해졌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고 (아직도 한 달이 넘은 게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거다) 내겐 딱 그만큼의 날들이 더 남아 있다. 그래서 어제가 아무리 행복했어도 오늘이 시작되고 또 지나가는 게 아쉽지가 않다. 이렇게 배부른 소리를 계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제쯤 여기에 발목을 잡히고 싶어질까? 아, 물론 베를린에 온 걸 후회하거나 기대 이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다. 친구들은 종종 내 안부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묻곤 하는데 나는 굉장히 잘 지내고 있다. 아무렴, 만 19세부터 혼자 밥을 지어먹고 잠을 청한 짬이 있는데.

베를린의 푸른 하늘과 높은 나무들 아래를 걷다 보면, 옷깃에 스며드는 소스라치게 차가운 바람도 견딜만하다. 찰나의 창밖의 햇살에 속아 분한 기분도 금세 사라진다. 어차피 정오가 지나면 색깔이 많은 거리마다 햇빛이 덧칠될 것을 아니까. 뭐랄까, 근 한 달 만에 이 도시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생긴 거다. 그래서 어떤 날은 우울이 평소보다 바짝 따라붙는 기분이 들어도 한국에서처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실로 잔인한 4월이 끝나감을 느낀다.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의 아침을 걸었다.

나는 고양이를 잃어버릴 일도, 자전거를 빌릴 일도 없는 이방인.

베를린 거리에는 이곳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의미 없이 밟히고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저마다 지닌 삶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여행지에서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 유적지, 랜드마크, 맛집 등을 가는 것은 여행의 가장 기본적인 룰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제대로 즐겨도 그곳의 문화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미 이 단계를 거친 나는 요즘 거리를 걷는다. 그냥 걷는다. 그날 둘러보고 싶은 대략적인 동네 정도만 정해놓고 주변을 정처 없이 걷는다. 처음의 목적지를 한참 지나치기도 하고, 그곳에 다다르기도 전에 전혀 다른 코너에서 에너지를 소진하기도 한다. 휴대폰 어플로 지도를 확인하느라 시선을 떨구는 게 아니라면, 땅만 보고 걸어도 그 도시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나)) 그리고 오늘 문득 깨달은 건, 사랑이 참 많은 베를린. 간단한 이정표도 이왕이면 하트 위에 새겨놓는다. 도처에 사랑이 널려 있다.




베를린에는 빈티지 숍이 정말 많고, 옷의 상태나 퀄리티가 상당히 높다. ((울먹))

*단정하고 화사한 동네 / color of Berlin @Prenzlauer Berg

*인적이 드문 조용한 거리 / color of Berlin @Prenzlauer Berg

*그라데이션 해 놓은 것 같은 건물들의 컬러 매칭 / color of Berlin @Prenzlauer Berg

*별거 아닌 것도, 별거인 것도 전부 예쁘다. / color of Berlin @Prenzlauer Berg




오늘의 유일했던 목적지, 보난자 커피(Bonanza coffee)에 도착!


유명한 보난자 커피.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이 짧은 거리에 어찌나 형형색색의 카페들과 디자인 숍들이 많이 있는지, 보난자 커피를 두 번이나 그냥 지나친 채 헤맸더랬다. 옅은 하늘색 외벽에 희미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필기체로 새겨진 Bonanza는 보난자임을 알아차리기 힘들어 보인다. 낡은 외부의 느낌과 달리 내부는 이렇게 깔끔하고 모던하다. 베를린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커피숍들은 전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다. 보난자도 마찬가지. 

플랫 화이트와 필터 커피, 그리고 견과류가 잔뜩 박힌 찐득한 비건 쿠키와 마들렌 식감의 초콜릿 베이커리. 같은 사진 아니고 두 번 시켜 먹은 거다.


일정이 길고, 혼자 하는 여행에는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과 꼭 가봐야 하는 곳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점심 대신 같은 카페에서 똑같은 쿠키를 두 번 먹고, 커피 두 잔을 내리 마셔도 된다. 혼자 살던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누린 자유인데, 지금 누리는 건 마치 한 차원 초월된 자유 같다. 자유의 한가운데에서 빙빙 돌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이 자유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선물이라 매 순간 마주하기가 아직은 조금 두려울 때도 있다. 오늘은 예외였지만,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강제 생명 연장 중 / 오직 느낌만으로 해석했던 (아마도) 엽편소설에 가까운 산문의 마지막 페이지

*책을 읽던 청년이 떠나가고, 두 번째 커피를 마실 즈음 창밖에는 노란 리본을 단 차가 주차돼 있었다. 뭉클한 기분




지하철에서 만난 천국
동네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괜히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커피와 도넛을 사들고 버스킹을 감상했다. 거리를 점령한 테라스에서의 여유가 오늘은 내 것이었다.                                

거리 위 사람들도, 건물들도 조금은 소란스러운 이 동네가 문득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집 근처까지 와 놓고선 돌연 커피와 도넛을 사들고 테라스에 앉게 만드는 곳이라 더욱. 덕분에 오늘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네. 나는 좀처럼 카페인에 취하지 않는 사람이라 순전히 분위기에 휩쓸려 커피를 마신다. 지구력 충전에 커피는 아무 소용이 없다. 식사를 거르고 커피로 객기를 부릴 수 있던 오늘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열쇠 꺼내기 100m 전

사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벌써 마지막 사진에 다다랐다. 이번 주엔 좀 풀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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