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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29. 2017

[베를린 살이] Hey, Lange zeit

이봐, 그건 긴 시간이야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에 위치한 프라터 가르텐 @Prater Garten


어제에 이어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에 또 들렀다. 벼르고 있던 맥줏집 <프라터 가르텐>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과연, 정원이라기보다는 작은 공원이라고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곳이었다. 썰렁한 입구를 지나고 나니 이윽고 나무가 우거진 곳에 길게 늘어선 밝은 노란색 벤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기 공연을 즐기기엔 (당연히)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신선한 맥주와 스낵은 준비돼 있었다. 이곳에서 직접 만든다는 맥주 프라터 비어와 독일식 소시지 브라트부르스트(bratwurst)가 오늘 나의 점심. 스산한 금요일 점심의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좀 썼다.


요즘 나의 favorite things는 H&M에서 산 얇고 큼지막한 검은 링 귀걸이, 스킨푸드 립앤치크 과일믹스의 핑크색 크림 블러셔,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기장의 검은색 민소매 티, 자연주의와 프라이막에서 산 검은색 레깅스, 빈티지 마켓에서 데려온 품이 큰 모직 재킷. 이 다섯 가지가 거의 매일 나의 외출을 돕고 있다. 
뭐랄까, 전에 없던 취향들이 정립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지금까지의 여행과 달리 베를린에 오기 전, 파마와 염색 어느 것도 하지 않은 것까지. 으레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예전과는 조금씩 다른 내 선택이 새로운 내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작은 변화들이 고맙다.

프라터 비어와 브라트부르스트! 소스만 다르게 뿌리고 두 개 시켜서 먹길 잘했다. 아주 칭찬해! 또 오고 싶은 곳이 생겨 신이 나는데, 그렇긴 한데 이 여행 중 나와 잔을 부딪쳐 줄 이가 생기려나?




*하케쉐 마크트(Hackescher Markt) 역에 위치한 하케쉐 훼페(Hackesche Hofe). (독일어는 평생 배우지 않겠습니다)


먹구름 아래에서 점심을 다 먹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늘 우산을 챙기고 다니는 덕분에 이동이 수월했다.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에서 멀지 않은 미테 쪽으로 옮겼다. 언젠가 오늘처럼 비상구 같은 시간이 필요하면 가려고 기억해두었던 카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름은 <BEN RAHIM>인데, 하케쉐 훼페에 위치해 있다. 예상은 했지만 지나치게 아담한 탓에,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임에도 어딘가 아지트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BEN RAHIM / 벤 라힘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 케이크 / 필터 커피와 에스프레소 케이크


비가 그칠 때까지 따뜻한 1시간 30분을 보냈지만, 보난자 커피에서의 두 잔만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 잔과 디저트는 조금 급히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하케세 훼페를 간다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임은 분명하다. 프리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곳이니, 이왕이면 테이크 아웃보다는 착석을 권한다. 여행지에서 필연적으로 긴장하게 되는 어깨와 늘 수고하는 다리를 잠시 쉬게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까.




*금요일이지만 일찍 귀가하는 쫄보 여행자의 자세 @Friedrichshain(프리드리히샤인)


동네로 돌아왔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늘 그렇듯 날이 개었으니까 모처럼 야외에서 1일 2맥주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덧 한 달 정기권의 마지막 날이자 사용 가능 시간이 다 되어서 (베를린 테겔공항에 도착한 첫날, 오후 5시에 교통권을 끊었다) 혹시라도 불시의 검문에 걸릴까 후다닥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동네 역에 도착한 시간은 5시 8분! 하루라도 시간을 더 벌어 새 정기권 사용 기간을 늘리려는 의지의 여행자. 후후...

내가 머무는 아파트 건너편 건물에는 작은 갤러리가 하나 있는데, 지금 일본 사진작가의 전시가 한창이다. 한 번 스윽 둘러보고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찍어보았다. 예술과는 무관해 보이는 평범한 건물 한구석에 이런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주거지 틈에서 덤덤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은 더 선명해 보였다. 그(그녀)의 사진들은 이곳을 떠나는 날 공개해야지.              

집으로 돌아가는 가방 속에 맥주와 감자칩이 있으면 든든하거든요.

실은 오늘도 카페에서 사랑에 대한 생각만 했는데 아직 글로 풀어낼 재주가 없다. 사실은 그럴 마음이 없나? 여유가 없나? 여기서 가장 널럴한 게 마음이고 시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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