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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30. 2017

[베를린 살이] Durchgehen

통과하다, 뚫고 지나가다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아침, 한 달의 끝과 두 달의 시작


바야흐로 베를린에 발을 붙인지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의 마지막 저녁과 두 달 차에 접어드는 첫 번째 아침을 찍어두었다. 이만하면 꽤 잘 먹고 지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결코 잘 먹는 게 전부는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과연 사람이 먹고 살 수만은 없구나 깨닫고 있다. 막힘없이 먹고, 또 싸고(..) 있는데 여전히 100% 산뜻하지는 않은 기분이다.
한 달치의 예상 생활비에 맞게 환전해 간 돈을 기특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다 쓰고(물론 카드 결제한 20만 원 남짓한 쇼핑 제외), 오늘 아침에는 TARGO BANK에서 돈을 인출했다. 이렇게 나는 매일 일정량을 비우고, 또 채우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도무지 비워지지도, 채워지지도 않는 무언가가 마음 언저리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면 나는 무엇을 위해 떠나왔나- 조금 허무해진다.

여기서도 먹고살려고 장을 보고, 아침저녁으로 가스불을 켜고, 밤이면 감기에 들지 않으려고 경량패딩 조끼를 걸쳐 입고 자는 내 모습이 뿌듯한 것도 잠시란 말이다. 티 내기 싫은 감정을 숨기려 애쓰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 보이기 시작하면 끝인데. 아아 여기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마음의 색깔이 흐릿해지면 일단 눈앞에 화사한 걸 들이밀어야 한다.


어제는 비를 피하러, 오늘은 내 마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하케쉐 마크트 역 광장으로 피신을 왔다.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플리마켓이 한창이었다. 시간을 내서 널찍하고 유명한 플리마켓을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아무 역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풍경이 오히려 더 진한 분위기를 품고 있을 때가 있다. 케케묵은 물건들이 뱉는 낡은 숨냄새 대신 싱그럽고 파릇파릇하고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번지기 때문일까, 진정 쉼이 있는 주말 같은 느낌이다. 오늘은 나도 커피 대신 1유로의 즉석 오렌지 주스로 뒤늦게 하루를 깨웠다.

음, 작은 천국 같아.




*하케쉐 훼페의 시네마 카페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래피티 아트


이전 포스팅에도 등장하는데, 미테의 정돈된 쇼핑 거리 곳곳에는 크고 작은 디자인 숍과 갤러리들이 많다. 세련된 아트 순례도 좋지만, 베를린 어디에서나 쉬이 발견할 수 있는 그래피티 아트에 호기심이 있는 이라면 이를 보다 의미 있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케쉐 훼페의 골목을 추천한다. 짧은 동선 안에서 어반 아트, 스트리트 아트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 베를린 중심에 이런 천장 없는 갤러리가 있을 줄이야. 오늘도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나름대로의 이해를 만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Rosenthaler, Berlin @Hackeshe Hofe

미러볼과 한 쌍을 이루는 튤립이라니. 베를리너들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은은한 꽃향기를 맡겠구나. 착한 지옥 같은 밤을 상상해본다.




*하케쉐 훼페의 그래피티 골목 건물 2층에 숨어 있는 1유로 갤러리


순전히 입장료에 혹해서 들어온 갤러리인데, 은은한 감동을 받고 돌아갔다.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상설 전시들 다음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쓸쓸한 여행자라 자문자답하며 맞장구 칠 수 있는 전시가 참 반갑다. 왜 지난 한 달 동안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가장 마음이 평온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외롭지 않아서였구나. 아이고 단순해라.

민간인 사찰
어릴 적 읽은 동화 같은 그림들. 무수한 해피 엔딩의 한순간 같기도 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어딘가에 나도 숨어 있을까 봐.
이런 걸 보면 그냥 웃을 수밖에.

제각각인 프레임 속에서 나는 용케도 내가 소망하는 일상들을 찾아냈다. 가능한 소망하는 것만 보고 싶은 연약한 마음은 여전하다.

*이게 바로 베를린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직선적인 작품들. (그야말로 개(dog)판인 지하철, 알렉산더 플라츠의 TV타워,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속 형제의 키스)




다시 찾은 카페 필터의 필터 커피

매일 경계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느라 해가 지기도 전에 지쳐버리던 4월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도심 속을 걸어 들어갔지만 알고 보면 낯가리기 바빴던 오후 투성이었다. 그래도 그 사이에 이 도시와 친해지긴 했나 보다. 조금씩 욕심이 생긴다. 아니, 용기가 생긴다. 더 이상 구름과 비에 지지 않고 가능한 가닿을 수 있는 곳들을 향해 묵묵히 걸어나가리라, 다짐해본다. 여전히 잠을 청할 때면 침대 옆 무드등과 안대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모순의 밤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에라 이참에 '살아 버리는' 게 아니라, 어디 한 번 '살아 볼까' 하는 여행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래서 손쓸 수 없는 무중력의 공간이 마음에 둥둥 떠다니는 건지도 모르겠다.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의 Pub 추천 @홉스 앤드 발리(Hobs & Barley)

돼지비계를 정제한 하얀 스프레드-슈말츠툴레가 올려진 빵과 맥주 두 잔. 빵은 세 개째부터 느끼해졌고, 술은 두 잔째부터 얕은 취기로 번졌다. 술로 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 (오히려 속을 게워내려는 거면 몰라도) 상당히 석연치 않은 안주와 함께 두 잔을 내리 마셨다. 후회 중...




*왠지 모르게 그리워지는 오늘 아침과 이방인인 내 모습 같은 그림


매일이 이렇게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여기서도 내 밥상을 차릴 생각을 하려니 너무 피곤하다. 내일은 호스트가 삶아 놓은 감자와 볶아 놓은 아스파라거스를 먹어야겠다. 그래도 계란 프라이 정도는 곁들여야겠지 이왕이면 요거트도 먹으면 좋고...(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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