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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01. 2017

[베를린 살이] Einfach so

그냥

푸릇푸릇하고 울긋불긋한 아침입니다.

보통 집에 돌아오면 잠들기 전에 그날의 여행기를 바로바로 다듬어서 올리는 편인데, 이날 매 끼니와 간식을 술과 함께해서 그런지 일찍 뻗어버렸다. 이곳에서 나는 나름 주의를 한다고 가능한 낮맥 위주로 알콜을 즐기곤 한다. 점심을 먹을 때 이왕이면 주스나 물 대신 맥주를, 마음을 말리기 위해 카페에 들어가서도 커피 대신 맥주로 목을 적신다. 이른 저녁이나 집에서 차려낸 야식에는 말할 곳도 없고... 때문인지 은근히 밀려오는 취기가 한 번에 취해버리는 것보다 사람을 더 몽롱하게 만드는 것 같다.

*베를린의 흔한 놀이터. 그래피티 사이를 마음껏 휘적거리는 아이들


아무튼 이날은 호스트의 추천으로 동네 플리마켓에 들렀다. 이제 일요일 오전 스케줄은 플리마켓 투어로 굳어진 듯. 유명한 마우어 파크 벼룩시장에 앞서 우리 동네 프리드리히샤인의 마켓으로. 사실 조금 귀찮은 마음이 컸는데 웬걸. 나는 아침부터 여기서 이날 하루치의 구원을 전부 받았다.




@Boxhagener Platz in Friedrichshain


이곳에서 나는 7유로로 빈티지 블랙 드레스를 건졌다. 베를린에서 가장 흥겨웠던 버스킹도 감상했지만.. 어느 나라의 벼룩시장 풍경이 그러하듯 베를린에서의 주말 플리마켓에도 조금 시큰둥해졌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마우어 파크로 이동하기 전 잠깐 근처 카페 테라스에나 앉아 있을까 고민할 즈음 지나쳤던 거리를 다시 몇 걸음 되돌아갔다.  

누군가 노란 타자기를 앞에 두고 또 누군가 타자기 앞, 빈 방석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타로를 봐 주는 사람인 줄 알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노란 타자기가 다시금 내 시선을 잡아 끄는 바람에 돌아가 물었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는 개개인을 위한 시를 써 준다고 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아, 조금 촌스럽게 "혹시 신발 벗어야 하니?" 라고 물어봤구나.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는 시가 완성되기까지 10여 분을 보냈다. 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오늘 내 기분의 색깔은 파랑이라 말했고-하지만 우울하다는 의미의 블루는 아니라고 덧붙였다-내 가방에는 어제 산 과자가 그대로 들어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건 노란색과 책이라고 귀띔했다. 그의 창작을 돕기 위해 쓸데없는 말도 더했는데.. 

"나는 노란색을 아주 좋아해. 그런데 우리 엄마는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질투가 많대. 그녀는 내가 질투가 많아서 노란색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는 그래서 넌 정말로 자주 질투하니? 라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의견을 부정하진 않는다고 애매하게 답했다.

*The Book Written by Vinski (aka 베를린 타자기)


마침내 그는 시를 다 쓰고 '네게 읽어줘도 되겠냐'라며 물었다. 나는 낭송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터라 마냥 감격했을 뿐이고... 문예창작 전공자의 실로 황홀했던 오전이었다.

시 쓰는 풍경

프리드리히샤인을 떠나기 전까지 내게는 한 번의 일요일이 더 남아 있다. 그날도 이곳에서 또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때의 나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리에 앉게 될까? 예상치 못한 낭만적인 만남으로 인해 들뜬 기분을 안고 마우어 파크행 버스에 올라탔다.




*아마도 나보다 곱절은 더 낭만에 취해 있었을 사람들 @Mauer Park


보난자 커피가 있는 골목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마우어 파크에 왔다. 프렌츨라우어베르크에 다시 왔다는 소리다. 공원 입구에서는 단연 누군가 버스킹 중이었는데, 할렐루야-라는 노랫말이 섞여 들렸다. 과연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날씨였다. 불과 이십여 분 전에는 평범한 일상 속에 나 혼자 흐뭇해지는 낭만에 짜릿했다면, 이곳은 모두가 제 기분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여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기 키가 큰 나무 아래에서 나도 눕고 싶었다. 다이소에서 2천 원 주고 꽃무늬 돗자리도 사왔는데...(물론 캐리어에 처박아둠)

이곳에서 바람 햇빛 구름 3박자가 고루 어우러지기 참 힘든데.

*100% Organic street food


4월의 어느 날- 티어가르텐에서도 느꼈지만, 이렇게 맑은 날 유럽의 너무 큰 공원은 아무래도 나에게 안 맞는 것 같다. 유독 공원에서 겉도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단순한 외로움을 떠나서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랄까. 음, 금방 사라질 신기루 같아서일까? 일산 호수공원에서는 몇 시간이고 홀로 잘만 보냈는데.. 지금 한창 꽃박람회 시즌인데 가고 싶다.




나에게 마음을 말릴 풍경은 이 정도 사이즈가 적당하다.

베를린의 유명한 밤들을 혼자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추천을 받아 낮부터 흥에 취할 수 있는 club der visionaere에 왔다. 그런데.. 네.. 너무나도 안전하게 음악을 듣고, 어깨와 발끝을 들썩이며 술을 마시다 왔다고 한다. 나 뭘 기대한 거지?

마음 놓고 취하지 못했으니 분명 아쉬울 거야.




*또 다른 빈티지 마켓인 @Neue-Heimat(노이에 하이마트) in 프리드리히샤인 / 집 근처 역(Frankfurter Allee)에 위치한 Thai Snack


대낮에 클럽에서 나오는데 괜히 마음이 흐물거려서 (보통 이런 기분이 들면 오기가 생겨서 굳이 야외에서 무언가 충전하고 싶다. 그게 마음이든, 쇼핑백이든) 프리드리히샤인의 또 다른 유명한 빈티지 마켓, 노이에 하이마트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5시가 조금 넘었을 때라 마켓은 철수 중이었고 카페 테라스나 클럽을 즐길 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운 좋게 (이번에도 7유로로) 홀리스터 체크 셔츠를 건진 뒤 여전히 조금 쓸쓸한 기분으로 이곳을 빠져나왔다.

태국 여행 중 실컷 앓았던 기억 때문에 그 맛있다는 음식들도 즐겨 먹지 않는데, 집으로 가는 골목에 위치한 타이 스낵바가 자꾸 눈에 걸려 한 번 들어가(나) 봤다. 그리고 인생 팟타이를 맛보고 급하게 싱하를 추가 주문... 토탈 가격이 우리나라에서 파는 싱하 맥주 한 병 가격과 비슷해 새삼 베를린 물가에 흠칫. 여기서 마신 맥주로 간밤에 두통을 더 얻긴 했어도, 순간의 허기는 잘 달랬으니까 괜찮은 선택이었다.

일주일을 지나다닌 곳인데, 이날 새로 발견한 문구. 하필 이런 기분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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