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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09. 2017

[베를린 살이] Ja, na klar!

응, 물론이지!

비슷비슷한 아침 메뉴. 실로 나의 날들도 비슷해지고 있습니다.

실로 잔인한 4월, 베를린에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꽉 채운 4월을 보낸 스테글리츠(Steglitz)에서는 하루가 좋으면, 하루가 나빴다. 더러는 이틀이 나쁘고 하루가 겨우 좋아질 때도 있었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 여행에 한 달이라는 시간만 할애했다면 나는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다. 턱 끝까지 찰랑거리는 보고픈 마음이 흘러넘치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인천공항에 다다랐을 테다. 한국에서부터 젖어 있던 마음을 하루도 말리지 못한 채로 말이다.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으로 숙소를 옮긴 지 벌써 2주 차에 접어든다. 베를린에서의 나날도 두 달이 지난 지 오래다. 지내온 시간만큼 남아 있는 시간을 수용할 마음의 크기가 넓어진 기분이다. 이사한 곳의 방이 두 배 정도 커졌기 때문만은 아닐 테다. 어느 노래 제목을 따라 우울한 날들에 최선을 다해온 덕분인지 이곳에서는 우울할지언정 마음이 발끝에 떨어지는 날은 아직 만나지 않았다. 비슷하게 눈부신 아침, 비슷하게 든든한 식사, 비슷하게 고소한 커피, 비슷하게 놀라운 풍경, 비슷하게 피곤한 저녁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의 아침도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길게 하는 재주가 있다. 말대꾸 짬바가 여기서도 나오네.

노이쾰른을 가로지르는 다리. 실제로는 Morning Glory가 따로 없었는데 사진은 베를린의 디폴트 색감처럼 나왔다.
아니, 오늘 내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없었다고요.

잘 가요 행복한 사람들




2008년까지 베를린의 국제공항 중 하나로 이용되던 템펠호프(Tempelhof)

공원이 된 공항을 찾았다. 공항이었던 공원보다 이편이 더 근사하게 들린다. 휴대폰이라 디지털카메라를 챙겼어야 했구나. 블로그를 업로드하면서 처음으로 캐리어에 있는 까만 카메라를 생각했다. 아무렴 어떠랴. 카메라에도 오늘 오후의 바람을 담을 수는 없는 것을. 나는 꼭 바다에 온 기분이었다. 28년 치의 마음을 전부 꺼내 널어도 남을 이 거대한 공원 한구석에서 나는 너무 행복해서 잠시 또 겸손해졌다. 행복할수록 겸손해지는 나란 인간. 미안해요 평소엔 많이 오만합니다.

*오늘의 youth - 극단적인 일광욕


함께 롤러브레이드나 자전거를 탈 사람도, 이어폰을 나눠 낀 채 발을 맞춰 걷거나 고개를 까딱거릴 사람도, 나를 대신해 저 멀리 있는 매점까지 달려가 간식을 사 오거나 간이 화장실 앞에서 가방을 들고 기다려줄 사람 없이도 아주 괜찮은 오후였다.

*이건 나의 youth - 화이트 스니커즈와 사과 주스라니. 청순하고 청량하다.


풍경은 조용히 숨 쉬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그저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평화가 있다면 이날 이곳에 가장 많을 것이고 천국이 있다면 이와 비슷한 모습일 거라고 믿기로 했다.

저 멀리 보이는 TV 타워까지 완벽한 거리. 나는 나와, 내 마음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항은 참 넓구나. 나는 지금 당장 여기서 어디로든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고 공책에 적어두었다.

어린 딸과 보드를 타겠다는 아빠의 의지. 아름다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큰 갤러리




*베를린 3대버거 중 한 곳이라는 크로이츠베르크의 버거 마이스터. (미테의 시소버거는 이미 다녀왔고, 헤르만플라츠의 베를린 버거 인터내셔널만 남았네요)


며칠 전, 모토 베를린에 가기 위해 처음 크로이츠베르크를 들린 날. 나는 Schlesisches Tor 역 아래에 생뚱맞게 자리한 작은 버거집을 보면서 '뭐 저런 곳에서 햄버거를 먹겠다고...' 하고 의아해했다. 세상에, 매연이 365일 빙빙 도는 회전 교차로 한가운데에 자리한 버거집이라니? 아아 3대버거집은 그런 곳에 있었다. 나는 클럽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버거를 만드는 직원을 보며 기나긴 주문까지 지루함을 견뎠다. 참, (사진엔 없는) 주문받는 직원의 스윗한 비지니스 스마일에 홀려 또 올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과연 하루 중 가장 달콤했던 순간이었지.

*서서 먹어야 하는 간이 테이블마저 만석이라 근처 공터로 이동. 여기까지 와이파이가 터진다. 고맙고 사랑해요(?) 


칠리치즈 버거와 맥주. 최근에 감자튀김을 자주 먹어서 프라이즈는 패스했다. 나는 음식 사진은 좀처럼 공들여 찍지 않는 터라, 3대버거치고 세상 평범해 보이지만 오오, 한국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번! 수제버거의 핵심은 번이지 절대로 패티가 아니다. 물론 이름난 수제버거집의 패티는 대부분 평균 이상인 덕도 있지만, 아무튼 이곳의 번과 속재료들의 조화가 환상적이라 들려봄직하다. 

참, BBI(베를린 버거 인터내셔널)은 안 가봐서 모르지만, 크로이츠베르크의 버거 마이스터가 미테의 시소버거보다는 확실히 맛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이렇게 핫한 맛집의 경우 차라리 외부로 오픈되어 있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내부는 너무 좁고, 시끄러우니까요. 물론 그곳들에도 야외 테이블은 있지만 주문받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이미 영혼이 나갈 수가 있으니….




언제나처럼 이런 날씨에는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동네 플리마켓에 들렀다. 클럽 아니고 동네 플리마켓 화장실. 


그런데 저기 화장실에 낙서한 사람은 지금도 행복할까. 행복하다면 여전히 약 기운 때문일까. 부디 이 세상에서 다른 행복을 찾았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를 불행한 사람으로 봐도 되는 걸까. 내가, 감히?

오늘이 나를 계속 붙잡았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좀 따라다녔다. 어제 동네 카페 앞에 가지런히 버려져 있던 신발이 오늘은 동네 마트 앞에 놓여 있었다. 넌 어디를 가고 싶은 거니? 누굴 기다리는 거니? 물론 나도 이 두 질문엔 바로 답할 수 없는 처지. 안녕, 내일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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