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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12. 2017

[베를린 일기] 실체 없는 두려움과의 싸움도 이제 그만

잠시 베를린을 떠나며, Chilling night

이제는 이 도시가 익숙해졌지만,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실체 없는 두려움이 덮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 만난 가장 일상적인 풍경을 생각해 보자.'


가령, 퇴근길 도로 위에 늘어선 차량들. 빈 유모차를 미는 허리 굽은 할머니(처음 베를린에서 이 같은 노인을 봤을 때, 정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생각했다). 제멋대로 구는 자녀를 부르는 엄마의 높아지는 목소리. 고심하며 장을 보는 사람들.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하는 연인. 모습과 덩치는 흡사 늑대의 형상인데 결코 짖지 않는 개들. 나를 보며 짖는 개는 없고 무서워하는 나만 있다. 마침내, 나란 사람은 그저 지나가는 행인- 함께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탄 승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비로소 안도한다. 그러고 보면 벽돌 같은 마음에 스며드는 촉촉하고 따뜻한 숨결들은 대개 거리 위 무신경함에서 비롯되곤 했다.

문득 내 생애 가장 '안전'했던 시기를 떠올려 본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른 어떤 때도 아닌, 대학시절 안서호를 걷던 숱한 밤들이 아니었을까. 지금 내가 어느 도시의 어느 공원에서 그 같은 패기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동네 호수공원에서도 9시 이후에는 걸어 본 적이 없다) 짧은 연애를 마친 어떤 가을, 체대생들의 아침 훈련보다 앞서 호숫가를 달리던 내가 있었다. 또 새벽 2시가 되어도 마음이 눈을 감지 않아 무작정 자취방을 뛰쳐나간 발걸음들을 어떻게 셀 수 있을까.

그런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처럼 나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던 시절이 또 있을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걱정과 염려는 듣지 (들리지) 않고 앞만 보고 행동하던 그때. 나를 쓰기만 하고 '아껴'쓸 줄은 몰라서, 싫어서, 나는 아마 어렴풋이 그때가 생애 다시없을 참 좋은 날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좋은 날은 가버리면 '좋았던' 날로만 머물 뿐이니까. 아끼지 않고 이 좋은 날을 남김없이 전부 써버리겠다는 심정이었을까?

뭐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조금만 더 나를 소중하게 여겼더라면, 지금의 나는 보다 근사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종종 마주하는 내 얼굴은 안서호 위에 아른거리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못 볼지도 모르니까 미리 말해 두죠.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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