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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Jun 24. 2022

훔친 문장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을 훔쳐 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난처해질 수 있기에 주변을 살폈다. 거의 모두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핸드폰이 가로로 퍼져있는지 세로로 졸고 있는지 뿐이었다. 그런데 세 개의 역을 지나는 동안에도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이따금 책의 아래쪽 모서리를 만지작 거리는 손을 보면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어려운 문장을 곱씹어 읽고 있나 싶어 흘겨 본 책의 중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나는 다시 휴대폰을 보았다. 그런데 다시 두개의 역이 지나도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신경쓰여.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책을 든 사람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스크 때문에 인상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분명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그가 보고 있는 (읽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는) 책을 쳐다 보았다. 생각 없이 떨군 나의 눈길은 대견하게도 조금전에 읽던 문장을 정확히 찾아서는 이어 읽고 있었다.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저 분열과 진리라는 말이 신경쓰여서 계속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의 주인이 문장을 훔쳐보는 나를 쳐다볼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날아간 후였다. 분열과 진리라는 단어는 균형을 신봉하는 어중간한 나의 삶을 유혹했다. 내 책이었으면 분명 밑줄을 그어 두었을 것이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혹도 피곤해져 언젠가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듯이 부정, 직시라는 단어들마저 익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나는 책에 쓰인 나머지 문장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책의 주인보다 더 열심히 책의 내용을 읽고 있었다. 그는 미동이 없다. 나는 더 이상 책 주인이 나의 존재를 알아챌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때, 여기에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려 가던 나는 그가 이미 한참 전에 책과 함께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건 내가 훔친 문장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곁에 있었던 책에 있는 문장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오래전 마음 속에 새겨둔 문장들이었다. 파인 획들 사이에 먼지가 잔뜩 끼여 있어 그것을 읽기 위해 바람을 불면 주위가 뿌옇게 흩날리는 문장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때, 여기에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G.W.F. Hegel,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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