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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ook H Sep 25. 2024

친정오빠

늘 딸과 함께였다... 오늘도.....

9월 초.

친정오빠와 나란히 그림을 출품해 오빠는 특선을 수상했고 나는 입선을 수상했다.


그리고 우리의 그림은 2주간 인사동 마루아트센터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이번 수상작 단체 전시를 마치고, 현재 신랑의 잠깐동안의 부재중으로 내 그림을 찾아오지 못하고 있자 친정오빠가 자기 그림 실으면서 같이 실어 오겠단 말에 주하랑 허둥지둥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친정오빠의 전화... 용달기사아저씨의 차를 이용해 함께 타고 올 계획이었으나 오빠가 탈 자리가 없다며 그냥 그림만 보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실은 하루 전, 힘든 일이 있어 눈이 붓도록 울었다.


살면서 나는 늘 무언가 막힘이 있을 때마다 친정오빠를 찾았다. 이럴 때 오빤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고 오빠의 조언이 필요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멘토인 친정오빠가 온다는 사실에 반가워 기쁜 것도 잠시, 못 온단 말에 서운했는지 그동안 내 안에 가둬놓고 꾹꾹 눌러 담아 놓았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빠가 알면 마음 아플까 애써 웃으며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엄마를 빤히 보고있던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왜 울어?"

"응? 미안... 엄마가 울어서...."

"너무 기뻐서 우는 거야?"

"움.... 주하도 학교에서 힘들게 있다가 엄마가 가면 너무 반가워 눈물 나지?"

"웅!!! 맞아 그래."

"그런 거야. 그냥 힘들었는데... 삼촌 전화에 눈물이 났어."

"아~~"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매사가 상대를 위한 배려로 늘 손해를 보면서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친정오빠였다. 친정오빠를 대하며 내가 그동안 결혼해서 살아온 내 모습에서 친정오빠의 모습을 읽는다. 그리고 내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은 친정오빠의 전화통화로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붙잡고 있던 진공청소기를 켜고 부앙거리는 소음 속에서 엉엉 아이처럼 울어대었다.


막내로 자라서 고생을 모르고 커왔다. 그러다 보니 애교도 많았고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를 좋아했다. 한땐 연예인을 꿈꿨던 적도 있었다. 그럴 만한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나의 끼가 그 방향으로 나를 이끌기도 했다. 그런 통통 튀는 성격이 결혼을 하니 시댁식구들과는 정 반대의 성향이었고 항상 감성이 풍부해 활짝 웃으며 그때 그 상황의 감정에 충실해 나의 마음에 있는 말들을 쏟아내면 쟤 모자란 애 아닌가 싶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결혼생활 10년이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차분한 성격으로 변화되었고 그러면서 내 안에 쌓이는 불편함들로 나는 시댁에 발걸음 하는 것을 점점 꺼려했다.



이번에 신랑이 마당에서 뱀에게 물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신랑이 아프니 내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신랑도 챙겨야 하는데 차 안에서 혼자 기다리는 딸아이도 챙겨야 했다. 밥도 먹여야 했고 밥을 먹인 후 신랑의 소지품들을 챙겨 다시 병원을 와야 한단 생각에 정신이 없는데 그렇게 병원생활 2틀쨰 되던 날.... 어디 불편한데 없느냐 화장실 갈 거냐 내가 부축해 준다 딸아이와 아내가 그렇게 아빠를 생각해 서로가 아빠를 도와준다 설레발을 치고 있는데 나란히 앉아있는 모녀를 번갈아 바라보는 신랑의 시선에서 어떤 마음으로 우릴 훑어보고 있는지 생각이 읽히면서 착잡한 마음에 그대로 주하를 데리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도움보단 우리로인해 신랑은 더 힘들어했다.


우린 하루 전, 아빠의 깁스 다리에 신발이 없기에 엄마와 함께 아빠가 신을 깁스 신발을 만들었다.

딸아이도 아픈 아빠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신나서 만들었는데 빨리 가져다주고 싶은 거 하루 꾹 참고 다음날 달려가서 남편의 다리에 신겨주었음에도 그런 우리 마음과는 달리 남편의 표정은 그저 병실 주변사람들을 의식한 채 우리가 얌전히 있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역시나 아빤 깁스 신발을 신지도 않았기에 엄만 그런 아빠의 깁스 신발을 담아갔던 박스에 다시 담아선 그대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엄마, 왜 아빠 안 줘?"

"아냐, 주하야."

"엄마, 아빠 줘."

"주하야! 제발~"


그리고 엄만 결국 딸아이를 울렸다.



딸아이를 데리고 양평 집(본가) 근처 우리의 단골 카페로 왔다.


본가에 들러 아빠 면도기도 챙겨가고 혼자서 그 큰집을 지키고 있을 단비 멍뭉이도 보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마끼야또는 카페마니아인 내가 생각해도 몇 안 되는 정말 맛있는 곳이었다.



카페 앉아서 딸아이에게 미안해 계속계속 달래주었다.


엄마가 미안했다고....

엄마가 못나서 그런 걸 너에게 화를 냈다고 연거푸 사과를 했다.


그리고 녀석은 팥빙수를 시켰고

엄만 라떼를 먹으며 우리는 그 달달함으로 우울함을 날려버렸다.


친정오빠가 내 그림을 보내면서 본인의 수상한 그림도 같이 보내주었다.


선물이라고...

너라면 이 그림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며.....


나에겐 친정아빠가 늘 부재중이었다.

내가 태어난 지 백일도 안되어서 돌아가셨고 오빠언니들과 다르게 아빠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해서 엄만 막내가 늘 불쌍하다며 막내막내하시며 늘 예뻐해 주셨다.


그럼에도 결혼해서 뭐가 그리 서운한 게 많은지 나는 엄마를 뜸하게 찾았고 요 며칠 다시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간 아무 일도 없던 듯 연락을 하고 있다.


엄마가 언제까지 건강하실 것도 아닌데 어린아이처럼 이제 엄마에게 봐달라고만 하지 말고 내가 봐드려야 한다고..... 이제부터 그래야 한다고.....  나는 아직도 조금씩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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