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불안의 뿌리 - 2
<<이전 글, "나의 인생을 바꾼 10살의 어느 오후"에서 이어집니다.>>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속에 아빠에 대한 기억은 좋은 추억들이 많다.
아빠는 수염이 까끌까끌한데도 오빠와 나에게 뽀뽀하는 걸 좋아하셨다. 우리는 수염이 따갑다고 피하기 바빴다. 외출해서 많이 걸을 일이라도 있으면, 아빠는 10살이나 된 내가 다리라도 아플까 항상 업어주려 하셨다. 날이 조금이라도 어두워지면 위험하다며 나에게는 절대 바깥 심부름을 안 시키셨다. 저녁 심부름은 항상 오빠 몫이었고, 오빠는 가끔 투덜거렸지만 나는 좋았다.
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여행을 자주 다녔다. 계곡에 간 기억, 바다에 간 기억, 경주에 간 기억, 캠핑을 한 기억. 아빠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엔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아빠는 항상 사진을 찍는 사람이어서 아빠 사진은 별로 없었다.
어느 겨울, 아빠와 오빠와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갔다. 나는 롤러스케이트를 골랐다. 오빠도 원하는 걸 골랐고, 엄마에게 줄 선물도 같이 하나 골랐다. 그리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사실은 내가 산타클로스야."
오빠와 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신나서 떠들었다. 매년 오빠와 나는 산타클로스를 잡겠다며 밤을 새우겠다고 버텼다. 물론 매년 잠들어버렸고, 성탄절 아침에 잠을 깼을 때는 한결같이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있었다.
아빠가 산타클로스라고 밝힌 그 성탄절은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성탄절이 되었다. '혹시 아빠는 마지막일 줄 알고 산타클로스라는 걸 우리에게 알려줬던 걸까.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떠나지 않았을까.' 어린 마음에 왜인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렸을 때, 큰 고모가 말씀하셨다. “너희 아빠는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이렇게 작고 귀여운 애를 어떻게 시집보내냐'라고 말했었데이. 니가 이제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는데 너희 아빠는 보지도 못하고...” 고모는 눈물을 지으셨다.
한 번은 외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아기 때 많이 울었는데, 너네 엄마는 힘들다고 툴툴대고, 너희 아빠가 니를 안고 달래고 그랬데이.”
어릴 땐 내가 아빠로부터 받은 사랑을 그냥 당연하게 느꼈을 테다. 모두 다 그런 줄 알았을 테다. 그런데 자라서 돌아보니 그 사랑이 컸구나 싶다. 우리 가족의 가장이자,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던 아빠가 떠나신 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엄마는 40세에 홀로 어린 두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미망인이 되셨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드셨을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동안 누구도 아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냥 모두가 조심했다. 먼 훗날 엄마가 말씀하시길, 그 당시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서면 땅이 흔들려서 그대로 주저앉곤 하셨단다. 땅이 꺼지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생각하셨단다.
저녁에 초인종이라도 울리면, 무심코 '아빠 왔다' 하시다가 '아참, 아빠 없지' 그러셨단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었던 젊은 엄마는 그러셨단다.
엄마는 우리에게 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걱정할까 봐 그러셨을 테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얼마 후, 엄마와 함께 폐업정리하는 옷가게에 할인하는 옷을 사러 갔다. 엄마가 나에게 반바지를 하나 골라보라고 하셨다. 나는 300원짜리와 500원짜리 두 개가 괜찮았는데, 500원짜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엄마가 300원짜리를 사면 안 되겠냐고 하셨다. 나는 500원짜리가 더 좋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엄마가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셨다. "500원짜리 반바지도 하나 못 사주고..." 하며 가게 바닥에서 눈물을 쏟으셨다. 나는 300원짜리도 예쁘다고 그걸로 사자고 했지만, 엄마의 마음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아빠가 계셨을 때 우리 가족은 평범한 서민이었다.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갑자기 가장이 되었고, 우리는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똑똑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밖으로 일하러 나가기보다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때 우리는 작은 단독주택에 살았다. 아빠의 공무원 월급을 아끼고 모아서 산 그 집은 부모님의 첫 번째 자가였다. 대출도 있었다. 일층에는 우리 가족이 살았고, 이층에는 세입자가 살았다. 수입이 필요했던 엄마는 우리 집 일층을 이렇게 저렇게 나누고 고치더니, 우리가 '옆방'과 '뒷방'이라 불렀던 두 개의 독립된 단칸방 주거공간을 만들어 각각 세를 주셨다. 엄마는 결혼 전에 일하던 은행과도 연결이 되어서 일을 도와주러 가곤 하셨다.
우리는 아끼며 살았다. 오빠와 나는 두 살 차이였지만, 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갔던 터라 학년은 연년생이었다. 엄마는 오빠의 모든 참고서와 문제집을 매 학년 초마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서 내가 쓰도록 하셨다. 사실 아주 어릴 때부터 항상 그렇게 해왔었다. 그때는 모두가 아끼며 살았다. 남들보다 우리가 좀 더 부족했을 수는 있지만, 나는 그런 걸 크게 느끼진 못했다. 엄마가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애쓰셨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새 문제집으로 한 번만 공부해보고 싶다"라고 했다. 그러자 오빠가 "난 문제집을 볼펜으로 막 쓰면서 공부해보고 싶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빨간 펜으로 밑줄 한 번 못 긋고, 별표 한 번 못 그리며 공부하는 것도 참 답답했을 테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여건에 맞춰 살아갔다.
그렇게 엄마는 악착같이 가정을 꾸려나갔고, 그 이후 우리는 좀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엄마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나는 수능 공부, 엄마는 자격증 공부. 엄마는 합격을 하셨고, 내가 대학생이 된 후 사무실도 개업하셨다.
'살면 살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살았고, 살다 보니 살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