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불안의 뿌리 - 3
<<이전 글들, #1 "나의 인생을 바꾼 10살의 어느 오후", #2 "일찍 떠난 아빠, 힘껏 살아낸 엄마"에서 이어집니다.>>
사실 나는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어렸던 나는 내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슬픈 건지, 그리운 건지, 불쌍한 건지. 그런 혼란스러움은 어쩌면 어린 내가 처했던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10살짜리가 겪어내기에는 버거웠던 것들이었다.
사람들에게 나는 불쌍한 아이였다. 사람들은 항상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고,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내가 아빠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길 바랐지만,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은 나를 예전과 다르게 대했다.
장례를 치른 얼마 후, 학교에서 어떤 외부 행사에 학생들을 보내게 되었고, 나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말했다. “네가 아빠가 없어서 뽑아준 걸 거야.” 참여하는 학생은 나 말고도 많았고, 나도 꽤 모범생이었는데 왜 이걸 아빠 없는 것과 연관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억울했다. 시기, 질투 같은 것이었을까.
다음 해 어버이날, 친구들은 종이 카네이션을 두 개씩 만들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줄 카네이션을 하나만 만들었다. 반 친구가 "넌 카네이션 하나만 만들어도 되니까 좋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카네이션 두 개 만들어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했다.
매 학년 초에는 호구조사를 했다. "아빠 없는 사람 손들어" 그러면 손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학년초가 끔찍이도 싫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지만, 나는 모두가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기억에 남는 한 선생님은 "아, 나도 아빠 없는데. 엄마 아빠 안 계신 애들은 나중에 나한테 와서 얘기해." 그러셨다. 나는 그 선생님이 좋았다.
나에게는 '아빠 없는 아이'라는 딱지가 늘 붙어있었다. 친구들도 친척들도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나를 불쌍하게 보았다. 나는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의 정점은 고교시절에 찾아왔다. 마음이 항상 무언가에 짓눌려있었다. 이유가 없어도 습관처럼 울었다.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 나는 꿈도 희망도 목표도 없었다. 그냥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상담을 받거나 치료를 받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정신과 치료가 뭔지도, 그런 게 필요한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정신과에 가는 것은 모두가 쉬쉬하고 흉보고 피하던 때였다. 지금처럼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절이 아니었다.
나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가족들은 나의 문제를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 모두가 겪는 학업 스트레스로 여겼을 수도, 그냥 사춘기를 보내는 걸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라는 생각으로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셨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걸 떠나 엄마는 이미 사는 게 힘드셨을 수도 있다.
끝이 없을 것처럼 어둡고 길었던 고교시절은 결국 끝이 났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딱히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바뀐 환경과 새로운 친구들은 나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우울과 불안은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어슬렁거리며 나를 찾아오곤 한다. 나는 그 우울과 불안의 뿌리에 '결핍'이라는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깨달음을 원망이나 자책하는 데에 쓰지 않는다. 나를 이해하고 다독이는 데에 쓴다.
"나는 그래서 그랬구나.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엄마와 나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 정도로 표현할까 싶다. '사랑과 미움'의 관계. 우리나라의 가장 흔한 모녀 관계일지도 모른다. 내가 관심과 응원을 못 받았다고 말한다면 나는 배은망덕한 자식일까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무뚝뚝한 집안이라 표현을 못 했던 것일 수도, 사랑을 줬는데도 내가 몰랐던 것일 수도, 정작 사람들과 벽을 쌓았던 건 나였을 수도 있다. 애써 그런 생각을 해보다가 또 남을 이해하려고만 하는 내가 문득 지친다.
엄마와 나는 잘 지낸다. 엄마는 지금 나의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드신다. 본인,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주까지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며 좋아하신다.
몇 년 전 새언니가 슬쩍 말한 적이 있다. "어머님이랑 얘기를 했는데 좀 미안해하시는 것 같던데..." 그 시기에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그냥 전반적으로 미안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엄마가 미안함을 느낀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 다른 사람에게 둘러서 내가 그런 얘기를 듣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시간을 보내고, 다시 연락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냈다. 풀고, 대화하고, 화해하는 과정은 없었다. 마음에 응어리가 졌더라도.
그런데 이제는 응어리를 풀고 싶어도 풀 수가 없다. 엄마는 알츠하이머에 걸렸으니까. 허탈하고 씁쓸하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그런 대화를 해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굳이 매듭을 푸는 것도 매듭을 짓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은 아니란 걸 안다. 삶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도 좋다는 걸 안다. 때론 긁어 부스럼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요즘 들어 한 번씩 엄마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들한테 해준 것도 없다. 너희들이 알아서 다 했지."
그러면 나는 말한다. "엄마도 참 열심히 살았지. 고생 많이 했다. 엄마가 말년에는 팔자 좋네."
엄마의 그 말속엔 미안함이 묻어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하트 모양 이모티콘은 잘 보내신다. 이런 게 엄마의 최선인지도 모른다.
엄마와 공항에서 헤어질 때 나는 눈물이 좀 난다. 엄마는 마냥 씩씩하시다. 나와 헤어진다고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나는 알츠하이머 때문인지 더 애잔하다. 괜히 '애증의 관계'라고 하는 게 아니구나 싶다.
나도 안다. 엄마가 열심히 사셨다는 걸. 자식 둘 때문에 더 열심히 사셨다는 걸. 그런 엄마의 삶에 콧등이 찡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때가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엄마는 엄마의 병을 모르신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건 행운일까 불운일까.
나는 행복한 엄마의 모습이 지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