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빛 좋은 개살구

by Hee언니

숀과 니콜은 싱가포르 부자 부부이다. 나보다 어린 두 친구는 석탄 광산을 소유한 갑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지낸다. 혼자 있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니콜은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친구 마틴을 소개해줬다.


시내의 토니로마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토니로마스가 여기에도 있었다니. 오늘은 립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소개팅인 듯 소개팅 아닌 소개팅을 했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즐거웠다. 말도 안 통하는 이 친구들이 영어로 솰라솰라 얘기하면 미소로 화답하고, 알아듣는 말은 최대한 영어 단어를 찾아 대답했다. 그나마 인도네시아 말을 하는 마틴이 있어서 중간 통역도 가능했다.


귀엽고 친절한 이 친구, 마틴은 착하다. 어느 날, 마틴은 자신의 형과 함께 팟타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자 허름한 식당이 나온다. 식당 외모에 실망을 하며 국수가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겠냐며 배 고프면 다 맛있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웬걸 맛있다. 배고파서 맛있는 거 아니고 진짜 맛있다. 고소하고 단짠 단짠. 먹고 나서 배탈도 안 났다.(로컬 식당에 가면 맛있어도 배탈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물이 안 좋기로 소문난 여기는 인도네시아)

신나게 밥만 먹고 다시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홀로 있는 외국인에게 밥 한 끼 사주겠다고 멀리 있는 맛집에 데려가 준 친구의 친절함은 따뜻했다.

하루는 우리 집 반려견 모모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참을 못 보고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마틴과 커피숍에 앉아 모모 얘기를 했다. 자기도 강아지를 키운 적 있다며 위로해 줬다. 관계에 있어서 말은 잘 안 통해도 어떻게든 마음은 전해진다는 걸 정확히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별일 없는 토요일, 갑자기 니콜이 숀 동생의 생일이라며 파티에 초대했다. 숀의 생일도 아니고 왜 나를 초대했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심심하니 가본다. 그나마 입을 만한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못 찾아갈까 봐 걱정 됐는지 숀 사촌이 데리러 오기까지 했다.


하. 클럽이다. 백만 년 만에 반짝이는 조명에 눈이 돌아간다. 룸으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젊은 외국인들이 20명은 족히 앉아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정작 숀과 니꼴은 없다. 오늘 못 온단다. 재미있게 놀으란다. 얘네는 왜 나를 부른 걸까. 이건 뭐지. 이 나라 젊은이들의 문화는 이런 걸까.

이제야 건너편에 앉아있는 마틴이 보인다. 가볍게 눈인사만 서로 건넸다. 그새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래서 연락이 없었군. 치. 사귄 것도 아닌데 은근 자존심이 상한다. 친구가 필요했을 뿐인데 아쉽다. 착한 그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샴페인을 터뜨렸다. 박수를 치고 웃음과 함께 생일 축하를 외쳤다.

노래방 기계도 있다.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이런 건 한국이나 여기나 비슷해 다행이다.

노래방 책이 나에게로 왔다. 일면식 없는 외국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려니 도망가고 싶다. 부끄럽다. 싫단 말이다. 옆에 앉은 친절한 외국인은 자꾸 노래 번호를 골랐냐 물어본다. 포기를 모른다.


에라. 일단 오랜만에 흥을 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이 같다.

내 차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팝송을 18번으로 하나 외워둘걸.

겨우 겨우 고르고 고른 얘네들이 알 수도 있을 소녀시대의 Gee(k-pop이 막 떠오르던 2011년).

소녀시대 8명 몫을 혼자서 숨도 못 쉬고 목 놓아 불렀다. 유리처럼 춤도 췄다가, 수영처럼 머리도 한번 뿌려보고 싶었지만 노래하기 바빴다. 헉헉헉.

임무 완료. 어색한 박수를 받고 구석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저스틴 비버 노래를 들으며 둘러봤다. 얘네는 뭔데 이렇게 부어라 마셔라 어화둥둥 룰루랄라일까. 궁금하다.






인도네시아는 빈부격차가 심하다. 대부분 내가 만나는 현지인들은 부자였다. 얘도 부자 걔도 부자인 상류층은 영어를 쓰는 해외 유학파가 흔하다. 석탄 부자, 가스 부자, 부동산 부자, 주식 부자.

부자는 많고 나만 거지구나.


숀과 니콜의 집에 간 적이 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펜트하우스. 티브이에서나 보던 으리으리한 집. 천장이 끝도 없이 높았고, 2층은 구경도 못 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하자는 친구들의 말에 거실 소파에 앉았더니 티브이와 소파 사이를 굴러다녀도 될 만큼 간격이 멀었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만 팔아도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다. 높은 천장의 으리으리한 샹들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우아함을 뽐냈다.


확실한 부의 차이를 느끼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비교할 조건조차 성립되지 않았기에 마음이 상할 일이 없었다. 만수르와 소시민의 차이 정도랄까. 무용과에서도 얼레벌레 묻어가더니, 부자들 속에서 빛 좋은 개살구로 살 팔자인가 보다. 아무도 내가 돈 쫓아 이 나라에 온 줄 모른다. 능력이 출중해서 온 줄 알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묻어가기로 했다. 나는 그냥 친절한 외국인으로 남으면 되겠구나. 이게 국위선양이지.






오랜만에 젊은이들과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허무하다. 술기운인가.

외로웠다.


얼른 돈 벌어서 집에 가고 싶다.

엄마 보고 싶다.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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