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백수는 계획에 없었다.
외화벌이를 하러 갔지만, 2달짜리 여행 비자를 받았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보통은 다 그렇게 여행 비자로 들어와서 취업 비자로 바꾼다고 한다.(사장의 말이라고 한다.)
어쨌든 여행 비자라는 걸림돌도 다 이유가 있는 거라 생각했다. 2달 동안은 현지 적응을 위한 시간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먹자 다짐했다.
2~3일에 한번 공사 중인 스튜디오를 보러 갔다.
이분들 일 하는 스타일 좀 보소. 철거를 하는데 쪼그려 앉아 망치로 나무 한 조각을 계속 두드린다.
앙상한 손가락 두 개로 녹슨 못 한 개를 들어 올린다. 천천히 못 하나를 슬로모션으로 옮겨놓는다.
그렇게 인부 2명은 거의 두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는 철거를 보여줬다. 한국인의 빨리 빨리는 상상도 못 할 엄청나게 쪼개지는 나노 단위 철거. 이해 못 할 일들의 시작이겠지.
세월아 네월아 일하는 현장을 보자 답답함이 밀려왔다.
괜히 일찍 왔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준비가 되면 이 나라로 왔어야 했다.
속 터지는 인테리어 현장을 보니 일을 시작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언어 공부를 했다. 인도네시아 현지인 선생님과 1대 1 과외를 4번 정도 받았다. 미리 준비해 간 동영상 강의도 봤다.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아침에 일어나 온수기 없는 욕실에서 찬물 샤워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대충 아침을 차려 먹었다.
침대의 유혹을 이기려 10시는 돼야 문을 여는 몰(쇼핑센터)의 스타벅스로 출근을 했다.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킨다. 가끔 카라멜 마키아또의 달콤함으로 당충전을 하는 호사를 누릴 때도 있다.
비싼데 느린 인터넷은 집에 설치하지 않았다. 커피숍 무료 와이파이로 이메일도 확인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도 보내본다.
노트북은 동생 남자 친구가 줬다. 지금 입은 반바지는 동생이 사준 것이다. 고마운 게 자꾸 생각난다. 울지는 말아야지.
책도 읽어본다. 한글로 된 책은 이제 이게 마지막이다. 웬만해선 반복해서 책을 읽지 않는 내 습관이 바뀔 수도 있을까.
책 문단 밑으로 텅텅 비어있는 종이를 한참 들여다봤다. 인생의 텅 빈자리와 맞물렸다.
이렇게 한가롭게 한량 노릇을 할 일인가. 불안이 엄습한다.
정오의 뜨거움이 덮쳤다. 뱃속에서 요동치는 내장들이 공복의 현실을 일깨운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말소리가 커진다. 귀동냥으로 인도네시아 말을 들어보려 애쓴다. 동영상 강의에서 나왔던 말이 있나 귀를 쫑긋거려 본다.
하. 하나도 안 들린다. 말이 빠르다. 공부나 더 해야겠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