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체류 해도 될까요.

by Hee언니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싱가포르로 비자를 받으러 간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입국할 때 2달짜리 관광비자를 받았다. 취업 비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일을 했다가 걸리면 어마무시한 벌금 투척이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2달의 백수 기간에는 먹고 자고 놀고, 적응의 기간이다.


드디어 일을 할 수 있다는 취업 비자를 받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싱가포르에 갔다.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1박은 사치, 새벽부터 일어나 무박 비자 여행을 준비한다. 깜깜한 새벽, 공항으로 가는 길은 비행기를 탄다는 이유에서였을까, 붕 뜨는 마음과 함께 출발을 했다.

비행기 좌석에 잠깐 엉덩이를 붙였다 잠들만하니 도착한 싱가포르. 비자 대행 사무실에 여권만 가져다주면 임무가 끝이 난다. 서류가 준비될 동안은 관광객 모드이다. 무얼 해야 할까.


비행기에서 내려 싱가포르 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여기는 서울인가. 집으로 돌아온 건가.

깨끗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얼굴도 엇비슷했다. 여기는 서울이다. 단 1초 만에 향수병 걸린 외국인 노동자의 고향 상경 드라마가 펼쳐졌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하철을 타고 비자 대행 사무소를 찾아간다. 지하철, 두 달 만이다. 반갑다. 서울에서는 지하의 답답함과 시끄러운 소리, 열차의 움직임에 따라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웬만하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던 사람이다. 오늘은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느낌이 좋다.

여권을 건네주고, 여기저기를 혼자 기웃거렸다. 관광객인 양 지도를 펼쳐 들고 두리번거려 본다.








싱가포르 하면 사자 분수지. 사자 입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보며 멍하니 내 입도 벌려본다. 덥고 습한 기운은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 두 달이란 시간은 적응을 만들었는지, 이 정도 더위는 이제 익숙하다. 더위를 피하는 노하우도 터득했다. 끈적함을 달래려면 건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역시나 이 나라도 에어컨은 빵빵해서 입 돌아가기 딱 좋다.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이키며 다시 지도를 펼쳐든다. 최대한 가까운 동선에 무엇이 있나 매의 눈으로 살펴본다.


찾았다. 마리나베이.

그 유명한 마리나베이도 가본다.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끈적함이 서서히 올라올 때쯤 도착한 마리나베이.

수영장 인생 샷은 못 건져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저 화려한 건물은 보았노라. 솔직히 별거 없었다. 건축학 개론은 첫사랑 영화라는 것만 알고 있는 건축미 문외한은 재빨리 더위를 피하려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아냈다. 마리나 베이 앞 미술관에는 왜 하필 달리 전시회를 하고 난리. 우연한 기회에 예상치 못한 예술의 만남은 언제나 설렌다. 유명한 달리 님을 여기서 뵙다니. 감탄과 기대를 동시에 안고 찬찬히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역시 달리는 달리, 대작가. 흘러내리는 시계 그 유명한 감동을 마음에 품고 나왔다.


@photo by pixabay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가면 걸어 다닐 수 있는 이곳이,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이곳이 자꾸 생각 날 것 같다. 가끔이나마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미술관이 있다는 것도 마음에 쏙 든다.


강을 따라 걷다 보니 한강에서 룰루랄라 마실 다니는 느낌이다. 익숙한 도시의 느낌이 그리웠다. 빌딩숲이 그리웠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그리웠다.

울적할 때는 사람도 보고 차도 보고 지나가는 개도 보며 정신 팔려 걸어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이란 게 멈춰버리던 날들이 있었다. 정신줄을 놓고 다니던 그 시절이 고팠다. 걷는 것, 그 간단한 행위가 힘든 자카르타의 인도가 밉다. 걸음의 향수는 짙었다. 유독 진하게 다가와 진동하는 냄새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을 위한 것이겠지. 새로운 목적지를 알아가는 그 행위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어주는 것이겠지. 아침에만 해도 새로운 곳에 간다는 기대감이었는데, 낯선 곳이라는 설렘이었는데. 익숙한 풍경으로 변해버려 잠식됐다.


자카르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다시 가야 하는 건가. 불법체류라도 하고 싶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건 다행인데, 갈대 같은 마음이 흔들어댄다. 뭘까.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알지도 못하겠다. 자카르타로 홀로 떠날 때도 그랬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주를 이루는 흥분이었다. 그저 새롭기만 하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리는 못돼 먹은 습성일까. 서울이라는 익숙함으로 가고 싶은 본능일까.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도 익숙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변덕스러운 마음. 일하겠다고 비행기 한번 타더니 처음이 무섭지 두 번은 쉬운 죽먹기의 마음인가.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왠지 모를 아쉬움들이 뒤섞여 짜증 범벅이 되어버렸다. 한번 더 도망칠 용기는 없었다. 확신은 없지만 책임은 져야 하는 자카르타의 삶을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서울로 비자를 받으러 가지 않는 건 인도네시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그렇다는 소리가 있다. 가까운 싱가포르로 비자로 변경을 하러 가는 건 이제 자카르타로 돌아오면 끝이니 마지막으로 도망 칠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깜깜한 밤공기를 맞으며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익숙하다. 익숙한 뜨거운 공기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눈빛. 정돈되어 있지 않고 흩어져 있는 어지러운 건물들. 잘 짜여 있지 않은 들쑥날쑥한 익숙함이 편안하다.

이곳은 내가 사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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