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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ul 13. 2023

결혼기념일의 하이라이트

8년 차 결혼기념일은 밥 한 끼 먹은 걸로 만족한다.

(어제의 결혼기념일 고기는 이전 글에 있습니다.)


어제 아침, 아이들에게 재미 삼아 물어봤다.


"오늘 저녁에 파티하자. 아빠, 엄마가 사랑해서 결혼을 했고 너희들이 태어났잖아. 결혼기념일인데 뭐 없어?"


나름 제일 나이가 많은 초등학교 2학년 첫째가 케이크를 사준다고 한다. 키워놓은 보람이 있다. 지는 걸 싫어하는 둘째가 자기도 뭘 하나 해주겠단다. 그렇다면 너희 둘이 힘을 합쳐 케이크를 사달라 당당히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다 함께 다시 집으로 모인 시간 오후 5시, 케이크를 사러 동네 빵집으로 갔다. 첫째가 자기가 제일 큰 형님이니깐 자기 돈으로 그냥 케이크를 산다 한다. 돈 쓰는 걸 누구한테 배웠는지 참 쓰는 걸 좋아한다. 다 사준다는 이 아이의 씀씀이가 걱정이다. 평소 케이크를 사면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이기에 조각 케이크나 제일 작은 사이즈로 사자고 이야기했다. 내 의견은 안중에 없다. 자기들끼리 난리가 났다. 한 명은 뽀로로, 한 명은 노란색, 한 명은 제일 큰 걸로 사자며 이것저것 들여다본다. 내 기념일에 나의 의견은 무시됐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케이크 진열장 문을 열어젖히며 달려드는 셋째를 말리며 겨우 의견을 다시 제시해 본다. 몇 번의 설득 끝에 중간 크기 3호 생크림 케이크를 골랐다. 첫째는 지갑에서 지폐 3만 3천 원을 꺼내서 계산을 했다. 빵집 사장님은 계산하는 첫째를 보며 무슨 날이냐 물으신다. 아빠, 엄마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아들이 사주냐며 감탄하는 두 분의 칭찬 세례에 아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자식 키운 보람이 있네.


든든한 아들 셋과 케이크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셋째는 케이크 촛불이 붙이고 싶어서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며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집으로 도착했고, 케이크에 초를 꽂아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역시나 촛불은 막내가 모조리 껐고, 꽂혀있던 초를 다 뽑기도 전에 과일을 달라 아우성이다. 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는 포도와 체리, 블루베리가 몇 개 올려져 있다. 생전 체리 안 먹어본 아이들처럼 서로 체리를 달라고 난리. 생크림 묻었다고 씻어달라 난리. 이럴 거면 왜 케이크를 샀을까. 체리를 끝내고 포도도 씻어주고, 블루베리도 씻어줬다. 케이크는 안 먹는다. 왜 샀냐고.


과일 먹기가 끝나자 그제야 신랑과 나는 사이좋게 케이크 한 조각 싹을 접시에 덜어 포크로 먹기 시작한다. 발견했다. 빵과 빵 사이에 들어있는 파인애플. 또 서로 달라고 난리다. 이럴 거면 과일 통조림을 사지 그랬니.

그렇게 기념일 축하 케이크는 주인공을 위해 아이들이 양보했다. 우리만 신나게 먹었다.


케이크 축하 다음 차례는 대망의 하이라이트, 결혼식 동영상 보기이다. 매년 결혼기념일에는 결혼식 영상을 보며 그날을 추억해 본다. 아이들도 화면 속 아빠, 엄마가 신기한 듯 구경한다. 그날의 엄마, 아빠의 축복을 함께 축하해 준다. 8년 전 그날의 우리는 아름다웠구나. 아직까지 같이 살고 있다니. 드레스 입은 엄마가 어색한지 우웩 엄마 벗고 있다 놀리는 첫째가 벌써 9살이다. 동영상을 보는 내내 품 안에 폭 안겨있는 둘째가 벌써 7살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 등 아는 얼굴이 나오면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막내가 벌써 4살이다. 결혼기념일을 함께 축하해 주는 가족이 많아진 지금, 행복하다.


어제의 뜻깊은 날을 추억하기 위해 남은 케이크 반 판을 혼자 퍼 먹으며 글을 쓰고 있다. 아름다운 밤이다.





분명 과일 생크림 케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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