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독성 Oct 29. 2023

어느 날, 샤넬 재킷이 내게로 왔다.

의상디자인 전공한 동생이 인정한 패션테러리스트. 나도 잘 입고 싶다. 옷.


어릴 때는 엄마가 사주는 옷을 대충 입었고, 동생 옷을 가끔 입었다. 대학교 검정색 점퍼는 최고의 교복이었다. 가끔 동대문에 동생과 쇼핑을 하러 갈 때면 많은 옷과 길치의 조화로 옷은 고르지도 못하고 같은 곳을 빙빙 돌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찾는 눈이 없었다. 안목은 퇴화해 옷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 옷을 잘 사지 않게 됐다.


애를 낳으니 패션에 대한 관심은 바닥을 기었다. 임부복은 커다란 배 때문에 그냥 입을 수밖에 없는 옷이었다. 아이가 울 때 재빨리 젖을 먹이려 가장 열기 쉬운 지퍼 달린 수유복이 교복이 됐다. 애들이 크면 예쁜 옷을 좀 입으려나 했더니 애가 많다. 월, 화, 수, 목, 금 아침 등원용 교복은 회색 트레이닝 복 한 세트이다. 아이들이 좀 컸으니 이제는 치마를 입어도 될까. 트렌치코트도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 안고 있는 아이 발에 치이고 만신창이가 되는 마당에 치마는 누더기가 될 것이 안 봐도 비디오다. 아이들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가끔은 기분을 내려 예쁜 옷에 액세서리까지 풀 착장을 하며 멋을 내보고 싶지만 갈 데가 없다.


화장도 안 하고 대충 입고 다니는 모습에 요즘도 엄마는 잔소리를 한다. 대학원 시절 매일이 교복 차림인 모습에 남자 강사 선생님은 옷을 좀 잘 입어보는 게 어떻겠냐며 넌지시 패션테러리스트의 약점을 공략했다. 나의 추리한 모습이 짠한 걸까. 자꾸 사람들이 옷을 준다. 뭐 입던 거면 어떠리. 동묘 구제 시장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걸 보면 구제도 트렌드인데. 돈 굳어서 좋고 여러 가지 입을 수 있어서 좋고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몇 년 전부터 시고모님이 옷을 보내주신다. 딸내미가 정리하려 모아 놓은 것이 아까우셨는지 신랑 편에 물어보시고는 보내주셨다. 그걸 알게 된 형님은 왜 그랬냐 엄마를 다그쳤다고 한다. 그 뒤로 형님은 어차피 엄마가 줄거라 생각했는지 신경 써서 옷을 골라놓는다. 나는 좋다. 나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패셔너블한 옷들이 온다. 시즌 별로 한 번씩만 입는 건지, 새 옷 같은 옷들이다.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 하고, 철마다 올해는 옷 가지러 오라고 안 하시려나 기다릴 정도다.


며칠 전 신랑은 고모님 댁에 다녀왔다. 커다란 마트 쇼핑백 4개에 가득 담긴 옷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명품 트렁크쇼처럼 여러 가지 옷들을 입어보며 정리한다. 형님은 점프슈트를 좋아하시나 보다. 점프슈트만 5개가 나왔다.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것도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점프 슈트를 입어보지 않았다. 화장실 갈 때 괜히 민망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래도 주셨으니 입어봐야지. 입구를 잘 찾아 한 발을 넣고, 나머지 한 발을 넣는다. 팔을 걸어 바로 서서 거울을 보려는 찰나. 아뿔싸. 똥꼬가 낀다. 형님 키가 나랑 비슷하던데, 나는 요롱이였던가.


다음은 원피스 차례다. 항상 상체와 하체의 차이로 H라인 원피스는 입기 힘들었다. 상체에 맞추면 하체가 끼고, 하체에 맞추면 상체가 다. 요즘엔 아이들 안고 업었던 팔 근육이 살로 자리 잡아 상체가 튼튼해져서 그렇게 원하던 사이즈 통일을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라인 원피스는 부담스럽다. 출렁이는 뱃살에 힘을 주며 아무리 몸을 꼿꼿이 세워봐도 울퉁불퉁한 살들이 정리가 안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살을 빼서 입어야지 라는 막연한 희망을 앞세우며 고이 모셔둔다.(이런 옷들이 많아서 옷장이 터져나가는 거겠지.)


봉투 하나를 처리하고 다음 봉투를 열었더니 귀여운 하늘색 크롭 트위드 재킷이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크롭 재킷 제가 한번 입어보겠습니다. 옷을 펼쳐 팔 하나를 넣으려 무심코 본 안감에는 많이 본 브랜드명이 눈에 띈다.



씨에이치에이엔이엘
아니, 이것은 샤넬!



@CHANEL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명품이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라. 나 명품 좋아하네. 그냥 보기에도 샤넬 재킷은 예뻤다. 내돈내산으로는 어림없는 걸 공짜로 득템 해서 더 예뻐 보이는 걸까. 막상 입으니 좀 짧다. 배꼽도 내놓고 다니는 판에 재킷인데 뭐 괜찮겠지. 단추는 그냥 열고 입기로 마음먹었다. 동글동글 반짝이는 단추는 원래 장식용 아니던가.  이 옷 소화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고민이 또 떠오른다.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는 패션 테러리스트는 믹스 매치를 잘 못한다.


그런 나를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재킷 바로 아래 청바지가 보인다. 재킷만 주신게 아니구나. 세트 같아 보이는 통 넓은 청바지가 있다. 다들 얼굴만 내놓고 커다란 몸뚱이는 가렸더니 엄청 마른 줄 안다. 형님이 주신 옷은 죄다 55 사이즈. 바지는 원래도 55를 못 입었건만, 애 셋 낳고 더 커진 골반은 뼈를 깎아야 입을 수 있는 꿈의 사이즈 55. 통바지라고 얕봤다. 흐흐흐흡 악. 숨을 최대한 들이마시고 단추를 채운뒤 구겨지는 뱃살을 무시한 채 지퍼를 올렸다. 바지 안과 밖으로 흘러내리는 살들이 영 꼴 보기 싫다. 못 봐주겠다. 허리 꽉 찬 바지가 언제 터질지 몰라 얼른 벗었다. 제니 같은 핏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술 달린 카우보이 재킷, 레이스 치마, 롱 드레스, 털이 숭숭한 니트 가디건까지 신나게 옷을 입고 벗고 거울을 봤더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혼자만의 패션쇼를 즐겼더니 허리에 신호가 온다. 모델은 아무나 못 할 일이구나.



올해 안에 그림의 떡 같은 재킷을 입을 수 있을까. 청바지는 일단 보류. 



체리색 붙박이장과 세탁소 옷걸이가 짝퉁 채널처럼 보이게 하는 샤넬 자켓. 예쁨을 담을 수 없는 사진 똥손의 한계.





대문사진 @pinterest

저런 핏으로 입고 싶습니다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