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한 달을 거의 마음 졸이며 기다리다 2월이 다가오려 할 때, 이맘때쯤이면 입시를 치르고 합격의 기쁨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비해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신입생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았다.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얼마가지 않았다.
그땐 이해 못 할 일들의 연속이었다. 거부하면 하극상, 어이없는 돌림노래에지쳐갔다.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의 이상한 관행들을 이제는 추억이라며 만날 때마다 그땐 그랬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오티에 가면 힘들다며, 이상한 빨간 마이신캡슐 같은 약 두 알을 챙겨주셨다.
오티는 술 마시고 놀다가 오는 그런 곳이 아니었나.
숙취로 고생하면 먹으면 되는 건가. 이상하지만 일단 챙기고 본다.
최대한 두꺼운 빨간색 패딩 운동복 한벌을 입고, 짐가방을 챙겨 서울로 왔다. 뭘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학교 강당으로 들어섰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던 그때, 선배들이 등장했다. 젤을 듬뿍 묻혀 꼬리빗으로 단단하게 머리를 빗은 후, 머리카락 한올도 나오지 않게 망으로 감싸 올리라 한다.
이제 이 머리는 2박 3일 동안 풀지도 감지도 못한다.
버스에 올라탔다. 누가 누군지도 모른 채, 버스는 출발했다. 얇은 오리엔테이션 안내 책자에는 의미 없는 2박 3일 일정과 노래가 몇 곡 있다. 잠깐 졸았을까, 노래를 외우라는 선배의 말이 들려온다. 생전 처음 듣는 이상한 노래들은 개사만 한 듯한 학과 노래와 학교 응원가 였다. 시내를 빠져나오자 창문의 커튼을 닫으라는 말과 함께 왠지 모를 불안감이 휩싸인다.
자, 이제 시작이야. 무용과는 처음이지.
격하게 환영하는 언니들의 지지를 받으며 흔들리는 버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노래를 외웠다. 그녀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무한반복 플레이는 시작된다. 못 외우면 다시 다시 또다시 부르는 춤추는 관광버스 저리 가라 신나는 노래 세상. 뒤죽박죽 여기저기 섞인 노랫소리에 정신이 혼미하다. 그것도 못하냐는 인신공격으로 상처 입은 머리는 가사를 외울 수 없게 만드는 교란작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지.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바라며 쥐가 나는 다리와 함께 얼른 버스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도착한 오티 장소는 엄마 목장이다. 엄마가 미친 듯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이름부터가 별로다.
아까 몸이 힘든 게 낫다는 말은 취소. 퉤 퉤 퉤.
버스에 내리자마자 우린 쪼그려 앉았다. 오르막길 끝 멀리 보이는 숙소를 향해 열심히 오리걸음으로 돌진한다.
그동안 연풍대(뛰어 앉아 다시 뛰는 무르팍 나가기 딱 좋은 한국무용 동작)로 단련된 튼튼한 하체를 이용해 열심히 허벅지를 쥐어짜며 숙소 앞에 도착했다.
짐을 풀면서 핸드폰은 꺼서 거둬간다. 찍 소리도 못하게 외부와 차단당했다. 쉴만하니 가방만 두고 강당으로 오란다. 문밖을 나서자마자 뒤뚱뒤뚱 엉덩이를 실룩이며 올라온 거리와 경사에 입이 떡 벌어졌다.
강당에 모여 열심히 또 굴러본다. 노래는 아직도 헷갈린다. 집에 갈 때쯤엔 자동 재생이라는 전설의 노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구전가요가 되었다.
열심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군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G.I. 제인 저리 가라 할 만큼 혹독하게 굴렀다. 몸을 쓰는 사람들이라서 그렇다는 둥, 단체 생활(군무)을 해야 해서 그렇다는 둥 이유도 가지가지다.
몸이 힘들면 딴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시험하는 건가. 우리를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는 철학적인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굉장히 기세 보이는 누군지도 모르는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며 앞으로 엎드린 그 순간, 그 친구의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보았다. 이런 기센 언니도 우는 데 나도 울어볼까. 아니지, 이 정도에 울 수는 없다. 우는 건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아. 하늘이 두쪽이 나도 여기서 울지 않겠어.
생각 없이 구르다 보니 밥 먹을 시간이다. 가장 행복한 시간.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더니 이럴 때는 그래도 사람이긴 한가 보다. 콩알만 한 인간미로 밥은 먹게 해 주는구나.
식곤증이 밀려오면서 살짝 풀어진 긴장에 잡생각이 난다. 이러려고 내가 죽자고 춤춰서 대학에 온 건가. 이 언니들은 무슨 한이 이리도 많아서 우리를 잡아 돌리는 거지.
3학년 언니들은 체대와 함께 오티를 갔다 왔다고 하고, 2학년 언니들은 공식적으로 2박 3일 비공식으로 3박 4일 오티를 다녀온 역사 깊은 학년이라고 했다. 그냥 선배들에게 당한 걸 우리에게 돌려주는 건가.
밥을 먹고 일어나니 하하 호호 웃으며 선배들과 함께 걸어가는 미대 신입생들이 보인다. 그들은 예술학부라는 명목아래 함께 오티를 왔지만, 완전히 별개의 학과였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