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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by Hee언니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난 전설적인 커플은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엄마의 고향 경상도에 터를 잡았다. 큰엄마가 불러주지 않는 서울 친가에 가지 않는 우리는 으레 외갓집에서 명절을 지냈다. 큰 이모만 강원도 동해에 사시고 전부 포항에 사는 박가 집성촌. 5남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 보며 밥을 먹는다. 큰 이모 또한 사흘이 멀다 하고 동해 번쩍, 포항 번쩍하신다.

그렇게 우애 좋은 6남매는 별일이 있어도 별일이 없어도 오며 가며 시끌벅적한 생활이 일상이다.


명절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명절에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그곳, 엄마의 고향으로 우루루루 몰려든다. 태어나고 자란 외갓집은 교과서 행정구역 명칭에나 나오는 '리'. 이것은 한번 들어가면 내 의지로는 절대로 나오지 못하는 시골 중의 시골, 깡촌이라는 뜻이다. 무시무시한 그곳에는 가게도 없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하루 3번 정도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텔레비전 안테나를 천장 끝까지는 뽑아야 겨우 지지직 거리는 시선강탈 KBS1 채널의 전국노래자랑 정도는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 한번 잘해가지고 들어서면 맛있는 음식들이 한가득 우리를 맞이한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건 음식도 마찬가지, 먹고 돌아서면 먹고 또 먹고 계속 먹다 지칠 때쯤 집으로 돌아온다. 그즈음에는 포동포동 윤기 촤르르르 흐르는 달덩이가 동동 떠있다. 어른들은 부엌 한편에 술 박스를 착착 쌓아놓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인다. 그뿐인가 외할머니가 빚은 동동주는 어린 내가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코끝 알싸한 향이 진동을 했다.


딱 하나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재래식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곳.

지금은 거의 사라져 구전으로나 전해질 듯한, 아니 잊고 싶은 좀 많이 힘든 그곳.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인데, 변비인들의 최대 적이 될 수도 있는 그곳.

푸세식 화장실.


대청마루 아래 굴러들어간 신발을 겨우 꺼내 신고 밖으로 10 발자국쯤 걸어 나가면 코 끝으로 풍겨져 오는 냄새들이 먼저 반겨준다.

이제 시작이다. 준비하라. 흡.

숨을 최대한 들이마시고 판자로 대충 쌓아 올린 삐그덕 거리는 계단을 겨우 밟고 올라간다.

가장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잠깐 방심하면 활발한 화학 작용 암모니아의 향연에 눈과 코는 마비되어 감각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낮에는 숨만 참고 갈 수는 있지만, 밤에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산 짐승 울어대는 깜깜한 어둠 속에는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노래를 부르는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

결국 돌아서면 먹고 돌아서면 먹는 그곳에서 탈출할 즈음이면 뱃속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저장되어 온몸을 힘들게 했다.








며칠 씩 힘든 배를 움켜잡고서도 그곳이 좋은 건 친척 오빠, 언니들과 열심히 리어카를 타고 흙먼지 마시던 들판이 있었기 때문이고, 가물어 졸졸 흐르는 작은 냇가에 잘 띄워지지도 않는 종이배를 멀리 보내려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기 때문이다. 우물에 돌 던지며 까르르까르르 웃다가 할아버지한테 우물에 빠져 죽는다며 혼쭐나던 그 기억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콩알탄 타다다닥 던지면서 오두방정을 떨며 서로 놀리며 뛰어다니던 그런 추억의 기억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잘 먹고, 잘 놀았다.


그런 추억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축제 같던 5일장 이후엔 점점 줄어들었다. 하나둘 손주들은 어른이 되어갔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렇게 냄새나던 푸세식 화장실은 밭의 거름으로 변했다.








얼마 되지도 않은 기억인 듯한데, 자꾸만 잊히는 사실들이 있어 안타깝다.

좋았던 추억들을 잊기 싫어 결혼해서 맞이하는 8번째 오늘 설에도 계속 음식을 주섬주섬 입으로 끌어 담았다. 추억 속의 까르르 대던 아이와 지금의 아이가 만나 윷놀이도 한다. 벌써 1시간, 5판째. 몇 번이나 지고 있는 첫째의 실망하는 눈빛 때문에 일부러 져주려 애쓰고 있다. 꼭 이럴 때만 연속으로 나오는 '모'. 억지로 하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길로 찾아들어가는 윷가락처럼, 억지로 추억을 기억해 내려 하지도 지우려 하지 말고 가끔 떠오를 때 반겨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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