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메르스(중동 호흡기 증후군) : 첫째 임신 중이었다. 이때는 전염병이 솔직히 남일 같았다. 사람 많은 명동에 가봐도 몇몇 외국인들만 마스크를 썼을 뿐, 그렇게 나와는 상관있을 것 같지 않은 병이었다. 뉴스에만 나오는 나와는 상관없는 병이었다. 이름만 함께해서 다행이었던 메르스.
2017년 신종플루(지금의 A형 독감) : 둘째 임신 중이었다.
2009년 신종플루의 최초 출현은 아찔했고 겁도 났다. 새로운 질병의 출현에는 엄청난 공포가 따라온다. 그 당시 배낭여행 간다는 동생의 상비약을 위해 시간 많고 대학 병원 앞에 산다는 이유로 임시진료소천막에 타미플루(신종플루 치료제)를 처방받으러 갔다. 내가 전염병을 뚫고 약을 타왔다며 유세를 했다.
그때도 잘 넘어갔던 그 바이러스는 면역력이 약한 임산부는 찰떡 같이 알아본다. 둘째 임신을 한지 한참이 지났는데 입덧이 끝나지를 않았다. 오히려 잦아들던 구역질이 더 심해지더니 계속 구토 유발이다. 거기에 몸도 으슬으슬.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가 걸렸던지라 감기 몸살이 심해졌나 보다 하며 며칠을 앓았다. 감기약도 처방을 해줬는데 의사는 이상하다며 독감 검사를 했다. 당첨! 열은 나고 누렇다 못해 초록빛 콧물이 온 얼굴을 꽉 막고 있었고, 속은 안 좋고... 아기도 걱정 됐다. 노인(어머님)과 아이(첫째 18개월)가 함께 사는 고위험군 집합소인 우리 집 상황을 배려해 의사 선생님은 1인실에 격리 입원 시켜주셨다. 나와는 상관없던 전염병을 한번 겪고 나니 전염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2019 코로나: 2020년 2월 셋째를 임신했다.
4살, 6살 아이가 새로운 기관에 이제 막 적응을 끝낸 후였다. 코로나가 터졌다. 옮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유치원은 비상사태. 누구도 겪어보지 않았던 팬데믹은 모든 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불분명한 존재가 가져다주는 불안감은 아이 엄마로서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생활이 올 스톱. 유치원은 1달 휴원.
휴원 결정이 나고 마지막 하원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스트기를 사 왔다. 그럴 일이 없는데 웬걸 임신이다. 생각지도 못한 임신은 부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적인 아빠는 가장의 책임감에 어두운 고민을 했고, 겁도 없는 엄마는 무조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내 아이는 낳는다는 생각이었다.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호르몬 탓을 하며 매일 울었고, 신랑과 눈만 마주쳐도 피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바깥공기 한번 마시려 해도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무서워서 신발 한번을 못 신었다. 휴원 한 달, 병이 무서워 집밖으로도 못 나가고 집안은 전쟁이었다. 안팎으로 전시상황. 그렇게 버티고 버텨 고집스럽게 아이를 지켜냈다. 아직도 코로나는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뱃속의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아이를 셋이나 낳고 나니 지금의 세상을 물려준다는 게 너무나 미안했다. 점점 더 빠르고 치열하게 변하는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고 있다는 죄책감에 휩싸일 때가 종종 있다.
엄마라면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 게 좋을지 항상 고민할 것이다. 원하는 건 딱 하나,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키워주고 싶다. 코로나 이후에 어떤 새로운 전염병이 또 들이닥치더라도 불안에 떨지 않고 용기 있는 판단력을 행사할 줄 아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