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박스가 곧 터질 듯이 엄마의 음식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미역국에 들깨가루가 보인다. 난 들깨가루를 싫어한다. 들깨 넣고 끓이는 건 별로라고 이야기했는데, 안 좋아한다고 얘기했는데 또 들깨가 보인다. 철없는 딸은 괜히 투덜댔다.
아들 셋 키우느라 힘들다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친정엄마의 정성을 아직도 7살 꼬마 마냥 반찬투정으로 답하고 있다.
엄마의 반찬들로 밥을 먹으며 그래도 맛있다며 좋아한다. 문득, 우리 엄마 밥 언제까지 먹을 수 있지.
유난히 엄마를 힘들게 하던 딸이었다. 까칠하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항상 예민함은 엄마의 마음과 부딪치며 소리 냈다.
유독 엄마에게 까칠했던 어린아이는 그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래서 였을까.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무던하고, 털털하고, 해맑은 사람이라고. 나는 가식적인 사람였던가. 확실히 가식은 아니다. 얼굴에 티 나는 아주 안 좋은 본능으로 살아왔고, 이런 티 나는 얼굴로 세상이 원하는 예의 바르게 살기란 힘든 걸 알았으니깐.
그렇다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지랄 총량의 법칙 때문일까. 예민하고 까칠한 어린이는 항상 불편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발산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 맞다면, 난 내 지랄의 양을 유년 시절 다 써버린 것 같다.
그래서 무딘 삶으로 시작하는 어른이 되었나 보다. 이젠 예민하게 내 온갖 신경들을 긁어모아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들이 싫어졌다. 신경 쓰기 싫은 귀찮은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그래도 이건 귀찮아하지 않아야겠다. 엄마가 만든 정성스러운 집밥을 맛있게 먹는 일.
까칠한 나를 받아준 엄마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차려진 이 밥상을 꼭 기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