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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Jul 09. 2024

엄마 아빠가 지킨 결혼생활 수칙 2가지

대화와 존중


딸아, 


집에 오니 좋지? 무엇보다 드디어 '재판'이 끝났다는 말에 너는 참 좋아하더구나. 어쩌면 선물처럼 네가 오는 날에 맞춰 재판이 확정되었는지 모르겠다만, 엄마에겐 선물 중 선물이었다. 


그 재판에 대해선 참 할 말이 많다만, 재판 얘기는 나중에 하고. 오늘은 엄마아빠의 결혼 생활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꾸나. 


너는 언젠가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게 참 신기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진짜로 싸우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있겠니. 우리도 여느 부부처럼 말다툼도 하고, 더러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다만 네 앞에서만 안 싸웠다 뿐이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 아빠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게다가 아빠는 한번 결혼했던 사람이라, 결혼 생활에 생길 수 있는 많은 문제점을 이미 겪은 사람이었지. 


엄마도 늦은 나이에 결혼하는데다가 문화가 다른 외국인이다 보니, 이 결혼생활이 제대로 굴러갈지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때 한 가지를 약속했다. 그게 무슨 문제이든, 그 문제를 혼자서 끙끙대면서 숨기지 말고 털어놓자는 약속이었다. 쉽게 말하면, '대화'를 통해 풀자는 것이었지. 


아빠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전 경험을 통해 문제를 숨기다 보면 한없이 커진다는 것을. 


그리고 네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약속을 했다.    


아이 앞에서는 절대로 싸우지 말자는 것, 그리고 아이 앞에서 서로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말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이 약속을 지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엄마와의 결혼 초기에 일종의 트라우마 증상을 여럿 보였다. 


그중 하나가 걸핏하면, "나를 무시하는 거냐?" 였고, 또 하나는 "지금 불평하는 거냐?"는 반응이었다. 엄마는 그때마다 기가 막혔다. 





예를 들면 신혼여행 갔을 때였다. 


우리는 신혼여행지에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웠거든. 아침 먹고 나가서 오후 네다섯시까지 다이빙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다이빙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오는데, 엄마도 아빠도 지쳐 있었지. 오는 길에 어느 술집 바깥에 '해피아워' 표지판이 붙어 있더구나.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술값을 싸게 받는다는 뜻이었다. 


아빠는 "어, 해피아워네! 우리 저기 가서 맥주 한잔할까?" 하더라. 


그때 엄마는 많이 지쳐있었다. 온몸이 소금기와 땀으로 찐득거려서 빨리 씻고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게다가 그 술집은 에어컨도 없이 실내와 외부가 트여 있는 구조였다. 서향이라 해 질 녘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그냥 호텔에 가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오더라. 


그랬는데, 숙소에 들어오면서부터 얼굴 표정이 심상찮았다. 똥 씹은 표정에 말이 한마디도 없더구나. 토라진 거였다. 한참 후에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하더라. 


허 참, 엄마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또 한 번은 엄마랑 아빠가 비디오를 빌리러 갔다. 아빠가 어떤 비디오를 가리키며 "이게 재미있어 보인다"기에 "응, 재미있어 보여!"라고 말하고, 엄마는 엄마가 좋아하는 또 다른 비디오를 골랐다. 


아빠는 엄마에게 묻기만 하고 그 비디오를 고르지 않더구나. 엄마는 "왜 자기가 고른 비디오를 안 가지고 오지?"라고 의아했지만, 무심코 엄마가 고른 비디오를 빌려서 왔지. 


그런데 집에 와서 "나를 무시하냐?"고 묻더라. 엄마는 이번에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지만,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렇게 생활한 게 1년 정도는 됐거든. 


그래서 술 한 잔을 놓고 말문을 열었지. 포문을 열었다고 봐도 되겠다. 


엄마가 여러 가지 말을 했다만, 핵심은 이거였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을 해라. 당신이 좋아하는 걸 행여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짜 좋아한다면 나를 설득해라. 말하지 않는 당신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지. 


엄마의 말이 먹혔는지, 아빠는 그 이후, "무시하냐"라는 말은 하지 않게 됐다. 엄마는 한시름 놓았지. 







그런데 말이다. 네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또 "불평하냐?"는 말을 입에 담기 시작하더구나. 


우리가 같이 여행할 때, 유난히 낡은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비행기가 좀 낡았다고 했더니, 그걸 자신에 대한 불평으로 여기더라. 또 호텔에 발코니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말도 자신에 대한 불평으로 여기더구나. 


그 '불평 스토리'도 1년 정도 진행됐던 것 같다. 엄마가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지. 


엄마는 그때도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말을 했지.


"당신이 이전 결혼생활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왜 모든 걸 당신에 대한 불평으로 받아들이느냐"라고. "내가 비행기에 대해서 불평하면 그냥 같이 불평해 주면 되지, 왜 그걸 당신에 대한 불평으로 받아들이느냐"라고 말했었다. 


이 얘기도 물론 술 마시면서 했지. 우리는 중요한 얘기를 맨 정신으로 한 적이 거의 없었던 듯 하구나. 안 그러면 너무 심각해지니까 말이다. 역시 술은 대화의 윤활유가 맞다고 본다. 물론 술 안 마시고 대화가 잘 되는 커플도 있겠지만 말이다,


엄마는 나중에 알았다. 그 이면에 아빠의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다는 것을. 아빠는 자신이 한 모든 것에 대해서 칭찬받고 싶은 데, 그 모든 것에는 아빠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일까지 포함되어 있더구나. 


아빠는 여행 일정을 짜고 호텔이며 항공권 예약을 하는 것이 상당히 스트레스였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힘들게 했기에 엄마의 작은 불평 하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 


나중에 엄마는 우리 가족의 여행 일정을 짜고, 예약을 하는 일을 도맡았지. 아빠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으니까. 





아빠를 좀 찌질이처럼 묘사해서 실망했니? 아빠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란다. 


아빠도 엄마도 그 상황을 덮어 버리지 않고, 밖으로 끌어내 '문제'임을 받아들이고, 서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이지.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 생활은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일만 있었겠니? 항상 작은 트러블은 있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나가서 풀었지. 네가 없는 곳에서 말이다. ^^


우리가 무엇보다 조심한 것은 네 앞에서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 거였다. 오히려 추켜세워줬지. 


언젠가 엄마가 너를 때렸다고 말한 적 있지. 


그런데 그 이후 네가 "엄마가 나를 때린 것 같은데, 때린 적 있어?"라고 물었을 때, 아빠가 옆에서 "아니, 그런 적 없어. 엄마가 너를 왜 때려"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기억나니?


그때 엄마는 아빠에게 무척 고마웠지. '아빠는 무조건 내 편'이라는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엄마라고 다르지 않았단다. '엄마도 아빠 편'이었다. 


언젠가 아빠가 네가 한 사소한 잘못에 엄청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때 너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라 아빠의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도 아빠가 좀 과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의 그런 반응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한 말은, "아빠가 좀 피곤해서 그랬을 거야.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거 알지?"라고 했던 것 같다.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엄마는 말이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녀 교육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단다. 





그게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어떤 교육학자가 "부모가 서로 존중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자녀교육이다"라고 한 말이 마음속에 깊이 박혔거든. 


어쩌면 그건 엄마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불화를 보면서 느낀 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엄마, 즉 네 외할머니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술도 많이 드시는 편에다 외할머니를 힘들게 하는 분이었지. 인간적으로 좋은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으로선 참 별로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비난하고, 좋지 않은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상하더구나. 나를 부정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좀 심하게 표현하면 핏줄을 저주하는 기분도 들었다. 


"내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면, 그 나쁜 사람의 딸인 나는 뭐가 되는 거지?"


그런 기분이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뿐만 아니라, 엄마까지 싫어하게 되더구나. 물론 사춘기 무렵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도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면서 그런 감정은 없어졌다. 오히려 연민의 정이 생겼지. 


그렇지만, 나는 내 자식에게 내가 어려서 겪었던 그런 감정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할 때, 그리고 너를 낳아서 키울 때, 아빠에 대한 존경심은 꼭 심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 존중하는 모습도.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 네가 아빠를 '히어로'라고 부를 만큼 사이가 좋았고, 지금 네가 엄마를 존중하는 태도도 어쩌면 우리 부부가 처음에 했던 그 약속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네가 만약 결혼한다면 꼭 이런 부탁은 하고 싶다. 


'네 자녀 앞에선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무엇보다 '상대방을 비하하지 말고 존중하라'고 말이다. 


엄마가 오늘은 아빠 흉도 좀 보고, 엄마 자랑도 하고... 좀 부담스러운 짓을 했구나. 


네 나이 정도면 이해하겠지 싶어서 했다.


딸아, 우리 잘 지내자. 사랑한다!  



2024년 7월 9일 


엄마가


#딸에게쓰는편지 #부부관계 #대화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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