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소공 Jul 11. 2024

사랑으로 지은 집

아빠의 통 큰 기부! 


딸아,


내일은 남해 외갓집에 내려가는 날이다. 네가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올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지. 


남해 외갓집은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걸 너도 알지?


바로 아빠의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아빠의 숨결이 살아 있는 집! 그래서 집에 오면 마치 아빠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고는 한단다. 







이 집은 크*** *****님의 사랑으로 지어진 집입니다. 가족을 아끼는 그의 마음이 이곳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그를 기리며 사랑의 마음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랍니다. 
2018. 12. 27
가족 일동


비문의 내용대로 남해 외갓집은 아빠가 지어 준 집이란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네 사촌언니가 아빠 사망 1년 후 추도일에 맞춰서 이 비문을 세웠지.  


아빠가 왜 이 집을 지어줬는지 내가 너한테 설명을 했던가? 그 집을 아빠가 지어 준 것이라는 말은 너도 들었겠지만, 아마도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한 부분도 있을 거야. 





우리가 한국으로 오고 나서 1년 정도 됐을 때니 아마도 2016년 초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남해엔 태풍 영향으로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지은지 50년이 넘었던 외갓집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집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지붕의 일부도 날아가 버렸단다. 


당시 그 집에는 둘째 외삼촌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그 집을 수리할 만한 돈이 없었다. 퇴직하고 나서 하던 사업이 계속 실패하고 외삼촌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거든. 외숙모 건강도 좋지 않았고. 


그런데 그 집을 그대로 두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참 난감했지. 엄마는 외숙모가 보내 준 사진을 아빠에게 보여주며 "고향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단다. 


그런데 네 아빠가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보더니, "그 집을 내가 지어주면 어떨까?"라고 말하더구나. 


엄마는 그때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그때 한 첫마디가 뭐였는지 아니?


"아니, 당신이 왜?"


정말 너무 뜻밖이었다. 사위가 아내의 친정집을 지어줬다는 말을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거든. 물론 찾아보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엄마 주변에는 그런 사례가 없었다. 


게다가 아빠는 재벌도 아니었고, 그동안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상당히 '짠돌이' 기질이 강했거든.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아픈 친정 가족을 위해 100만 원인가를 썼을 때도 아빠는 좀 못마땅해한 적도 있었단다. 그러니 엄마가 놀랄 수밖에. 엄마가 아빠에게 다시 물어봤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고향 집을 지어주고 싶어 하냐고 말이다. 


그때 아빠는 이런 말을 하더구나. 


"당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니까. 비록 내 고향 집은 없어졌지만, 당신의 추억이 담긴 그 집은 보존해 주고 싶다"라고. 





아빠 말대로, 아빠는 '고향 집'이라는 게 없단다.


아빠의 아빠, 즉 네 할아버지는 목사셨다. 그래서 아빠는 어린 시절을 계속 목사관에서 지냈다더라. 아빠의 아빠는 늘 자신의 집을 갖고 싶어 했지만, 목사 월급으로 집을 짓기는 어려웠나 봐. 


그리고 퇴임을 하고 나서 그 목사관을 나와야 했으니, 네 아빠는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 담긴 고향 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아빠는 늘 그걸 아쉬워했단다. 다시 찾아갈 고향 집이 없다는 것 말이다. 


너도 기억나지? 


몇 년 전 우리가 독일에 갔을 때, 아빠 가족이 살았던 그 목사관 앞까지 가보지 않았니? 비록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한참 동안 그 앞에서 서성거렸지. 어린 시절의 아빠를 생각하면서 말이야.  


아마도 고향 집을 잃어버린 아빠의 그 아쉬움이 엄마의 고향 집을 보존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것뿐만은 아니었단다.


아빠는 엄마 가족을 정말 좋아했다. 물론 엄마 가족도 네 아빠를 좋아했지. 우리가 엄마 고향에 갈 때마다 모든 가족이 다 모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모든 가족이 "크서방, 크서방"하면서 환대하는 분위기였지. 


아빠가 엄마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좋아했다는 말을 직접 한 적은 없었다. 다만 독일에 사는 네 고모를 통해 들었지.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네 고모가 그랬거든. 


아빠가 엄마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했고, 엄마의 고향도 자신의 고향처럼 좋아했다고 말이다. 엄마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간지럽긴 하다만, '엄마가 곧 아빠 마음의 고향이었다'고 네 고모가 말하더구나. 


20대에 독일을 떠나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던 아빠가 한국을 정착지로 삼은 것은 아마 이런 이유도 있었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너한테 얘기한 적은 없다만, 아빠는 한국인으로 귀화할 생각도 갖고 있었단다. 그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엄마에게 물어보기도 했거든. 


그러고 보면, 아빠는 참 특이하게도,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했다. 한국 음식도, 한국 사람도, 한국의 자연도! 


남해 고향집 앞마당



그 모든 게 어우러져 아빠가 엄마의 고향 집을 지어주긴 했다만,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 고향 집조차 상속분쟁에서 문젯거리가 됐다. 


그 집이 엄마에 대한 증여인지, 엄마 가족에 대한 증여인지를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었거든. 엄마의 변호사는 그 집은 당연히 가족에 대한 증여라고 보지만, 그쪽 가족은 그걸 인정하지 않더구나. 


하기야 엄마조차 처음에는 아빠의 결정을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 예전의 아빠라면 그렇게 의심할 만도 하지 않나 싶다. 


엄마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한 입장이라, 그것조차 판사의 결정에 맡기기로 했단다. 엄마 가족이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그건 엄마가 혜택을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딸아, 


다행히 최근 전달된 판결문에서 판사가 우리 편을 들어 줬더구나. 저 쪽 편의 주장에 대해 "말도 안된다!"라는 표현까지 쓴 걸 보면서 엄마는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단다. 

무엇보다 아빠의 선의가 제대로 평가받은 것 같아 엄마는 기분이 좋단다. 이번에 가서 아빠 비문을 한번 쓰다듬어 줘야겠다.  


엄마는 늘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있고,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재판이 지연되는 와중에도 그런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단다. 물론 힘들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이렇게 좋은 날도 오는 걸 보니, 어쩌면 이것조차 이런 삶의 태도가 불러온 행운이 아닐까? 우리 이런 삶의 태도로 계속 살아가자꾸나. 



사랑한다, 딸아. 



2024년 7월 11일,


엄마가 


#딸에게쓰는편지 #고향집 #사랑 #상속분쟁 #증여 #삶의태도 




이전 19화 엄마 아빠가 지킨 결혼생활 수칙 2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