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기 위해 긴 머리를 짧게 자른 딸에게
딸아,
토론토 여행을 끝내고 집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구나. 같은 집에서 지내면서 이런 편지 쓰는 것은 좀 어색하다만, 그래도 써보자.
토론토에서 돌아온 너는 유난히 밝아 보였다. 뭔가 자신감을 가득 품은 것 같더구나. 그러더니 기어코 머리까지 자르겠다고 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말이다.
너는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아이였지. 예닐곱 살 때 잠시 단발머리로 자른 것 외엔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긴 머리로 살아왔다. 너도 긴 머리를 좋아해서 한 번도 자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네가 왜 긴 머리를 자르겠다고 했을까? 그것도 짧은 단발로?
엄마는 처음에 말렸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기껏 머리를 짧게 잘라 놓고, 후회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매일 거울 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네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말릴 수밖에 없더구나.
그런데 너는 꽤나 단호했다.
"엄마, 나도 이제 변하고 싶어. 아니 변했어. 그래서 짧은 머리로 내 변화를 표현하고 싶어!"
그게 네가 머리를 자르고 싶어 하는 이유였다. 도대체 뭘 그렇게 변하고 싶었을까?
엄마가 알기로는, 여자들이 사귀던 남자랑 헤어지면 헤어스타일을 많이 바꾼다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도 처음엔 네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나 싶었다. 그런데 그건 아니더구나. 헤어스타일 바꾸고 나서도 남자친구랑 낄낄거리면서 통화하는 걸 보니.
사실상 엄마는 네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길든 짧든 그건 네 선택이니까. 다만 가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부분을 엄마한테 징징거리며 말할 때, 난감해서 걱정했던 거지.
그런 엄마의 걱정에 너는 "엄마, 내 머리는 빨리 길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기르면 되지 뭐!"라고 말하더라. 그게 바로 엄마가 머리를 짧게 자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거든. 그까짓 머리카락, 짧은 게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기르면 되지 뭐! 네가 드디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부터가 엄마는 마음에 들더라.
너는 "강해지고 싶다"라고 말했다. 여리고 착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당차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바꾸고 싶은데, 그 첫걸음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라니, 엄마는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지. 그게 물론 외모만 바꾼다고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네가 '변하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라고 생각한 계기가 캐나다 방문이었다니, 그건 좀 의외였다. 도대체 캐나다 방문은 너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너는 캐나다에 갔을 때 일단 느낌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날씨도 좋고 사람도 좋고, 말투도 좋았는데, 무엇보다 너 자신이 '캐나다에 잘 어울리는 사람' 또는 '환영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구나.
심지어 너는 캐나다에서 마치 '모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아니, 캐나다 사람도 아닌 네가 캐나다가 모국 같은 느낌을 받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니.
너의 설명을 듣고 나서 엄마는 좀 마음이 아팠다.
"엄마, 캐나다에서는 아무도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어. 그냥 다들 내가 캐나다 사람인 줄 알더라고!"
엄마는 한국 사람, 아빠는 독일 사람인 너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타이완에서 보냈다. 외국인으로 살았지. 심지어는 엄마의 모국인 한국과 아빠의 모국인 독일에서도 너는 외국인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호주에서도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고 했지. 물론 외국인이 맞긴 하지만 말이다.
캐나다에서 너는 언어부터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계속 미국 학교를 다녀서 미국식 영어가 익숙한데, 호주 영어는 좀 다르다고 했던가? 호주에서 친구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너, 미국에서 왔어?"라는 식의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했지.
그러다가 캐나다에 갔더니, 모든 사람들이 너와 똑같은 톤의 영어를 쓰고, 또 다들 너를 '그냥' 캐나다 사람으로 알고, 캐나다 사람처럼 대해 줬다고 했지. 누구도 "어디서 왔니"를 묻지 않고, 아무도 외국인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엄마는 네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많은 혼혈들이 그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엄마는 골수 한국인으로 살았으니, 정확하게 어떤 기분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네 말을 듣고, 좀 착잡해지더구나. 그동안 네가 알게 모르게 많이 외로웠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분', 그게 부정적으로 확대되면, '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 수도 있었겠지. 다행히 너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만, 어딜 가나 외국인 신세라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싶다.
그런 네가 캐나다에 가서 마치 모국에 온 듯한 느낌을 받고 또 자신감까지 생겼다니 엄마는 일단 기쁘다.
엄마가 가장 기쁜 것은 미래에 대한 네 심경의 변화였다. 너는 강해지고 싶고, 큰 세상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안주하는 대신,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말에 엄마는 뭐랄까, 좀 안심이 되더구나.
엄마가 너를 보면서, 늘 불안한 것들 중 하나가, '너무 착하고 여리다'는 것이었다. 남의 말에 상처도 잘 받고, 잘 울고, 늘 불안하고, 하지 않아도 좋을 미래의 걱정까지 앞당겨서 하는 편이었지.
네가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리고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걱정한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가뜩이나 말도 많고 시샘도 많은 그 세상에서 너처럼 여린 아이가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반대했다. 직업에 대한 편견은 아니었다. 그조차 나중에는 "네가 원한다면 해보렴"이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너는 결국 스스로 포기하더구나. 오디션 보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라고 말하면서. 그때 엄마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네가 이제 '강해지고 싶다'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강해지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네 각오만은 대단해 보이더구나.
네가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를 보면서 너의 '착하고 여린 부분을 잘라냈다'는 말까지 하는 걸 보니,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너는 캐나다에 가서 공부하거나 취업해서 살고 싶다는 말도 했다. 너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너무 좋다면서. 게다가 너는 그럴 경우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랑 헤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에 엄마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아무리 'out of sight, out fo mind'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런 걱정까지 미리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었다. 지금 남자 친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엄마도 조금 아깝기는 하거든.
네가 진짜로 캐나다에 가게 될지, 또는 남자 친구와 헤어질지 아닐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엄마가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구나.
너의 이런 변화는 일시적인 변덕일 수도 있다는 거다. 너는 호주에 갈 때도, 그곳이 너무 좋다고 하지 않았니?
네가 막상 캐나다에 가서 살다 보면 캐나다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단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 세상 어느 곳에도 내 마음에 꼭 드는 천국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언젠가 실망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든다니, 기회를 만들어 가서 살아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가끔은 작은 계기가 인생에 큰 변화를 불러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짧은 단발로 변신한 너는 그 헤어스타일을 참 좋아하더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큰 세계를 보면서, 네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언제나 너를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엄마가 한국에 혼자 산다고, 엄마 곁에서 지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거라. 엄마는 네가 전 세계를 무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있거든.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살 테니, 너는 네 인생을 살기 바란다.
2024년 7월 16일,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