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몽 Sep 15. 2021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인생

 나의  아르바이트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친구들과 모여서 피자 전단지를 붙이는, 찌라시 아르바이트였다. 테이프는 여분까지  개를 받는다. 하나는 주머니에 넣어두고  손에 테이프 하나와 오늘 붙일 두둑한 전단지를 한쪽 팔에 걸친다. 하면 할수록 빨라지고 요령이 생겨서 재미가 생긴다. 아파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5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내려온다. 다세대 아파트는 금세 끝나  맛이 난다. 하지만 어떻게 알고 경비아저씨가 쫓아오기 때문에 16살의 어린 나는 하는 내내 떨린다. 빌라는 마음은 편하지만, 엘리베이터 없이 오르락내리락해야 해서 몸이 고되다.  시간 고생해서 하루 일당을 받으면 친구랑 떡볶이를  먹고 문구점에서 다이어리를 꾸밀 스티커를 사면 끝이다. 남는  없다. 남겨서 저금하는 개념도 내게는 없었기에 남는 장사다.


17살이 되고 정식적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롯데리아다. 친구가 일하는 곳에 나도 일하게 되었다. 고2, 3학년 언니들은 이미 엔젤, 매니저의 직급을 달고 무서운 텃세를 부렸다. 매일매일 혼나고 손님 앞에서도 창피를 당해서 울었다. 고2. 나도 엔젤이 되었다. 교육을 수원으로 받으러 가고, 엔젤 유니폼을 치마를 입는다. 롯데리아의 이미지 역할이다. 얼마나 뿌듯하던지. 학교 끝나고 5시부터 10시 30분까지 매일 일했다. 주말에도 오전 타임으로 일했다. 학생인 나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돈은 받으면 다 써버 리거나 부모님께 드렸다.


등수대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나는 언니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나보다 등수가 3,4등이 높은 가장 친한 친구와 나란히 가기로 약속했는데 선생님은 나는 떨어질 거라고 다른 곳을 가라고 했다. 새로 생긴 교복이 이쁜 학교다. 그렇게 우리는 찢어져서 각자 다른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학교는 엄했고 특기생이거나 학원 다니는 친구가 아니라면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5시 50분 학교가 끝나면 입시 학원차들이 학교 앞에 줄지어 서 있다. 학교에서의 우정만큼 학원에서의 우정도 중요하다. 거의 반나절을 지내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이후로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 언니도 그랬다. 부모님은 돈 때문에 매일 싸웠다. 엄마는 잘 나가는 보험회사 팀장에 여행도 많이 다니고 상도 받았지만. 일을 하다 금방 그만두는 아빠 때문에 속상해했다. 내가 과외를 시작하면 과외비로 밤새 싸운다. 나는 집이 무섭고, 싫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는 내게 탈출구였다. 만만치 않은 어른들의 세상이었지만 내게는 집보다 안전한 곳이었다.  



2, 나는 인문계에서 상고로 전학을 갔다. 메이크업이 배우고 싶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졸랐다. 엄마는 내가 변덕스럽기 때문에 금방 그만둘 거라고 했다. 나는 많은 꿈을 꿔본 적도 없었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돈도 많이 든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달에 아빠는 카니발로 차를 바꿨다. 반항심에 차라리 취직할 거라며 상고로 보내달라고 했고 2번의 꼴등한 성적표를 보여줬더니 허락해주었다. 같은 지역 내에 전학은 흔하지 않았다. 나는 상고로 전학을 왔다.  자유롭게 아르바이트를   있었다.


나는  힘으로 살아갈 것이다.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계단에 숨어있으면 엄마가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부족한 잠을 잔다. 학교보다 내가 일하는 곳이 내게 진짜였다. 그곳이 전부였다. 그곳에서는 인정받고 친구들도 있고 돈도 벌었다.  


롯데리아를 그만두고 집 앞에 동네 빵집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옆 동네에 있는 파리바게트로 아르바이트를 옮겼다. 고3. 언니의 대학생 신분증을 들고 20세 이상만 구한다는 편의점에서 일했다. 엄마는 헤어자격증을 따면 메이크업학원을 보내준다고 했다. 한 번에 헤어자격증을 따고 평촌에 있는 박준 미용실에 취직했다. 언니들은 막내들이 염색을 해야 한다 했다. 나는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고 철사 스프레이로 후까시를 넣고 눈썹은 풍성하게 두세 개를 겹쳐 붙였다. 일이 끝나면 언니들을 따라 놀고 아침에 돌아왔다. 언니들은 상처가 많았고 거칠었다. 주말에 일하는 어느 날 옥상에서 수건을 개는데, 언니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부럽다고, 우리는 남들 일할 때 쉬고 남들이 쉴 때 일한다며 시궁창 인생이라고 했다.


그 표정이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바로 일을 그만두었다. 내 일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졌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22살에 서울 전문대를 들어갔다. 학교 다니면서 영화관 매점에서 일했고 방학 때는 매점 일이 끝나면 옆쪽에 있는 피시방에서 밤 12까지 일했다. 건너편 새벽타임 영화관에서도 일하고 끝나면 택시 타고 집에 돌아왔다. 여성 옷가게에서 6개월간 일했다.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미용실에서 후까시를 올라간 내 머리는 2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내려왔다. 지금에 와서  상상해본다.. 내 머리가 정상적이었다면 그 시절 남자 친구 2,3명쯤은 생겼을 텐데 하고 아쉬워한다. 나는 부지런했고 성실했다. 지각도 거의 한 적이 없다. 학교가 멀어 자취를 하게 되었고 조교 사무실에서 일했다.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언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텔 청소, 민박집 청소, 한국 감자탕 가게, 삼겹살 식당, 시부야 일본 식당, 내가 학원을 다니며 동시에 2개씩 했던 아르바이트였다. 텃세도 무시도 심했고 참 고됐지만 이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켜줄 거라고 믿었다.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에 일주일 가 있을 때면,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일당 5만 원을 받아왔다. 나는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일했던가.

일본 맥도널드에서 일했던 때


대학다니면서 일했던 미용실
12시간씩 알바했던 나고야역 이자카야


나는 돈을 저금하는 개념이 없었다. 통장에 돈을 넣어본 적이 없다. 그 달에 벌면 그 달에 다 썼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늘 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에도 매점에서 친구들에게 간식을 사주었다. 나의 주머니는 두둑했다. 집에 있기 싫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내게 세상을 만만하게 해 주었다. 일할 곳은 많았다. 어려운 세상이 아니었다. 어리고 힘 있는 내가 필요한 곳은 많았다. 힘듦을 겪을수록 나는 강해진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텃세가 심한 곳이어도 2주만 버티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지각하지 않고 성실하고 눈치가 빨랐던 나는 어디든 인정받고 잘 적응했다. 2주. 늘 2주만 죽었다 생각하고 버티자 생각했다. 그런 법칙들을 발견하는 게 재미있었다. 나의 삶이 특별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매일 일기를 썼다. 많은 경험들로 단단하고 넓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서전의 한 줄 한 줄을 상상하며 뿌듯해했다.


삼십 대 후반이 되어서 바라보는 나의 10대부터 20대. 안쓰럽다 젊은 시절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갔다. 내가 믿어온 것들이 방향 없는 질주였다고 생각해서 그 시간 조각들을 간절하게 모으고 싶었다. 그 시간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쉬어본 적 없이 일했지만 직장생활의 경력이 없는 나는 “ 조직생활 못해본 사람들은 티가 난다”라는 말로 정의 내려졌다. 어릴 때부터 충분한 잠을 자본 적이 없다. 나는 서서 졸았다. 친구들은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나를 기억한다. 아르바이트는 경력이 되지 않았다. 긴 아르바이트는 방황이 되어버렸다. 지나쳐 온 많은 세상들이 얼마나 추웠는지. 눈물을 참고 버텼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다. 그건 나의 사정이다. 지금의 넘어짐이 지금의 무시가 지금의 눈물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올바르게 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단단해지기는 커녕 어려움은 언제나 새롭다. 큰 벽을 넘어도 작은 돌부리에 넘어지는 것이 삶이었다. 방향 없이 바쁘게만 살았던 20대의 나를 마주해본다. 수고했다고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안아준다. 내가 인정해준다. 몰랐으니까. 내가 보는 세상이 정답이고 전부라고 믿었으니까


지금 이곳에 앉아있다. 매번 물어본다. 이 자리가 맞는지. 지금도 알지는 못한다. 20대와는 다른 결단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시작한다. 늘 시작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을 향해 오늘도 성실히 살아내려고 한다. 나의 30대는 어떻게 쓰일까. 기대가 된다. 지금은 충분한 잠을 자고 있다. 불안하지 않은 집에서 하루를 보낸다. 성장과 결과물에 쫓기고는 있지만 진작 이렇게 살지 못해서 아쉬움이 가득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내 공간에서 어린 시절 꿔야 했을 꿈을 꿔본다. 누구든 때는 놓치는 것 아닌가. 지나온 날들의 자기 연민을 내려놓고 그때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음을 감사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시스터 후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