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자매 이야기
엄마의 장례식장, 오랜 투병 끝에 엄마의 죽음은 모두가 알 수 있게 서서히 왔지만, 엄마의 죽음이란, 준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숨이 꺼져가는 엄마를 붙잡고 쓰러질 듯 소리치며 운 언니는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장례식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당신들의 인생은 나름 성공한 삶이라고 느끼게 해 주었던 언니의 대기업 삼성. 언니는 삼성에 입사한 후부터 아빠에게 이름을 잃었다. 아빠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크게 언니를 삼성이라고 불렀다. 우리 가족이 모두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전에 삼성에서 장례지도사가 도착해서 모든 장례일정을 도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아직 엄마 사진과 꽃들이 도착하지 않은 빈소에 멍하게 앉아 있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장례지도사와 분주하게 움직이며 빈소의 꽃 규모부터 장지, 발인, 유골함, 음식의 메뉴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결정을 하고 있다.
언니와 나는 두 살 터울의 자매이다.
언니와 나는 성격부터 외모까지 정반대이다. 자매지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체형과 얼굴도 닮지 않았다. 착한 말투와 순한 얼굴에 단정한 모범생 언니와 덜렁거리고 까불고 공부도 못했던 동생인 나.
언니의 머리는 올백으로 하나로 묶고 머리띠까지 꽉 눌러써서 머리카락이 한 올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긴 생머리에 빨간 머리띠를 하고 가는 언니의 뒷모습이 얄미워져서 언니의 머리에 코딱지를 파서 묻혔다. 누구나가 볼 수 있도록 크게. 늘 바쁜 엄마에게 준비물을 놓고 왔다고 울면서 가져다 달라고 전화하는 언니가 이해가 안 됐다. 선생님한테 한번 혼나거나 한 대 맞으면 되지 왜 저럴까. 매일매일 밖에 나가 놀았던 나와는 달리 책상 앞에 앉아있던 언니의 뒷모습이 생각이 난다. 나는 언니를 친구가 없다고 놀렸다. 정말 언니 친구는 내가 다 알정도로 손에 꼽혔다. 방학이 되면 동네 동생들이 우리 집 앞에 모여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나가서 동생들과 하루 종일 산에서 풀밭에서 풀을 뽑아 요리하고 돌을 돈으로 상상하며 시장놀이 엄마놀이하며 놀았다. 엄마는 동생들을 이끌고 다니는 내가 부끄러운 거라고 했다. 나는 생라면을 비닐에 넣고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 어느 날 언니가 친구랑 놀고 있는 운동장에 생라면을 들고 간 적이 있었는데 언니는 창피하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나는 공부도 못했고 지저분했다 언니는 매일 나를 더럽고 공부도 못한다며 놀렸다. 나는 내복을 입고 학교를 가기도 하고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가발이라며 나가서 놀기도 했다. 언니는 항상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았지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맞았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때리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언니와 난 이렇게 늘 달랐다. 중. 고등학교 때는 단정한 단발머리에 자기 어깨보다 큰 마이에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안경을 쓴 누가 봐도 모범생인 언니가 창피했다. 그때 신디더 펑키, 쎄쎄 등 청소년 잡지가 유행했다. 나는 잡지에 나오는 화장품을 사서 바르고 아이라이너 바르는 연습을 했다. 헐렁한 여분의 교복을 입고 가방 안에는 슬림하게 줄인 교복을 가지고 다녀서 선생님 눈을 피해 입고 다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춘기를 보냈고 같은 공간에 살고 있었지만 각자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재수를 결정하면서 언니가 전에 다녔던 재수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언니가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롯데리아였기 때문에 나도 부담감 없이 첫 아르바이트로 롯데리아에서 일했다, 신촌에서 자취했을 때, 그 많은 아르바이트 중 언니가 아르바이트했던 크리스피 크림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언니가 갔던 길을 우연히 밟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잡시 겹쳤을까. 하지만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면서 언니랑 고시원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언니는 바빠서 집에 없었다. 우리가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결국 처음 독립에 힘들었던 나는 3달 만에 집으로 돌아가서 통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니는 호주로, 나는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사실 20대 때에 언니의 모습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대의 언니는 어느 곳으로 질주하고 있었을까.
일본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방황을 오래 했다. 밤에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아침에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왔다, 1년의 어학연수에서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돌아온 언니와는 달리, 나는 3급으로 갔다면 3급의 실력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언니는 나에게 교회를 가자고 했지만 나는 내키지 않았다. “너 오늘 놀려면 돈 필요하지? 교회 갈 때마다 돈 줄게” 5천 원씩 만원씩 받으며 예배 자리에 앉아있었다. 새벽예배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들어올 시간이었으니까. 그런 내 옆에서 언니는 방언이 터지고 옆에서 하나님을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나는 친절한 교회 사람들이 싫고 관심이 어색해서 싫은 티를 잘 냈다. 나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오면서 자주 욕이 터졌다. 그렇게 돈을 받기 위해 교회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언니의 옆에서 기도를 했다. 진짜 하나님이 내 옆에 있다며 만나 달라고, 내 삶이 너무 엉망인 것 같으니 이런 나도 만나 달라고 기도했다. 2달 후 , 기도하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진짜 있어! 하나님이 진짜 있어!! 그때부터 내 삶은 180로 바뀌었다. 믿음이 생기고 교회를 다니면서 언니를 대하는 내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언니 친구의 추천으로 야마하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언니 친구는 나와 이야기를 하더니 계속 배꼽을 잡으며 웃는 것이다. “현영이랑 말하는 거 진짜 똑같아. 자매 아니랄까 봐. 그런 말 많이 듣지?” 내가 언니가 똑같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가 자매인 줄도 모를 정도로 다른데, 똑같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언니는 똑 부러지고 현명한 스타일이라면 나는 거칠고 생각 없는 스타일이라며 정반대라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는 자매라 닮은 부분이 있었구나. 언니에게 얘기하면서 신기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친구들에게 언니 욕을 곧 잘했다. 답답하다 이기적이다. 자기만 잘난 줄 안다. 나는 언니에게 자주 화가 나 있었지만. 사실 언니의 관심이 필요했었던 것임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언니는 바빴고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고. 밖을 나가면 절대 나와 식사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돈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언니가 좋아서 싫었다. 툴툴대고 공격적이었던 내 표현은 애정이었고 서운함이었다. 나의 삶은 언니의 영향을 항상 받아왔던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표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20대에 스쳐갈 인연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쓴 것 같아 후회가 된다. 내 시간을 아끼지 못했고 내가 나를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내게는 나와 닮은 듯 다른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언니가 있는데, 왜 나는 항상 밖에서 돌고 돌면서 친구들을 찾았을까. 우리 자매는 지금에서야 우리의 어린 시절을 자주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왜 우리가 쉬지 않고 달리는 자매인지, 책을 좋아하는지 등등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많다.
장지가 없어 4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잠들기 전 서럽게 울던 언니와 달리 나는 담담했다. 언니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정이라고 생각하고 엄마라고 생각하고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언니가 내 옆에서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지금도 다르다.
최근에도 자매가 정말 다르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정말 언니와 닮았네요 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언니는 또 다른 나다. 삶의 모양은 다르고 각자 추구하며 나아가는 가치관도 모습도 말투도 모두 다 다르지만, 언니의 아픔과 기쁨은 곧 나의 아픔과 기쁨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