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했던 실수
매년 엄마 아빠는 여름이 지나가기 전, 포도가 저렴한 끝물일 때, 포도를 잔뜩 사와 채에 몇 번을 걸러 씻어서 장독대에 이쁘게 담아 담금주를 콸콸콸 부어 포도주를 만들었다. 한 달 정도 장독대에서 맛있게 숙성이 되면 아빠는 보물단지를 열 듯 뚜껑을 조심히 열고 국자로 작은 소주잔에 담아 가지고 온다. 쌈을 크게 한 입 물고 동시에 캬아 하며 입에 털어 넣는 포도주가 맛있게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학교 3학년의 반이 지나가는 여름. 나도 여름밤의 갈증을 장독대의 시원한 포도주로 날리고 싶었다. 꿀꺽, 입맛을 다시며 아빠 맛있어? 물으니 이 맛에 살지 하며 다시 소주잔에 포도주를 담아와 입에 털어 넣는 것이다. 무슨 맛일까.
시간이 꽤 지나고 엄마 아빠가 늦는 어느 날 오후, 친구와 라면을 끓여먹는데 장독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포도주 마셔볼래? 마시고 물을 부어 넣으면 우리가 마셨는지 모를 거야! 친구와 나는 이미 맛을 보기로 마음을 먹고 소주잔이 아닌 컵에다가 한 국자 두 국자 가득히 컵을 채웠다. 하나 둘 셋 하면 벌컥벌컥 마시기다! 하나 둘 셋!
친구와 나는 겁이 나 살짝 혀로 포도주를 맛보았다. 맛이 나지 않았다. 포도주의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한번 홀짝, 또 홀짝, 아 부족한 것 같아! 우리 다시 한번 마셔보자~ 하면서 세 번 넘게 컵에 가득 채워 맛보았다. 혀가 눈이 머리가 가슴이 순서대로 마비되는 것 같은 재미있는 기분에 우리는 깔깔깔 웃으며 장독대를 닫았다. 내 몸이 아래로 아래로 자꾸 주저앉는 것 같은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눌렸다가 다시 깃털같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판타지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하하하 나의 웃음소리가 내 귀에 멍하게 울렸다. 용기가 불끈불끈 솟아 장독대 안에 줄어든 포도주 따위는 무섭지도 않았다. 어른의 맛을 맛보았다는 그 짜릿함에 더 취한 것일까.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짜릿했다.
저녁에 되어 제정신을 차렸을 때, 아차 싶어 장독대를 열고 우리가 마신 포도주만큼 물을 쏟아부었다.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에 더 많이 부어 넣었다. 아빠의 보물단지를 잘 채워 놓고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날 아빠는 포도주의 맛이 변했다고 못쓰게 됐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 해 농사를 망쳤다는 듯이 허탈해하는 아빠 모습에 미안해져서 이실직고를 하게 되었다. 아빠는 마셨으면 그대로 두지 왜 물을 부어 넣었냐며 물을 넣어서 이제 못 마시게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때의 충격이란, 아빠는 내가 술을 마셨다는 사실보다 물을 넣어 못쓰게 된 포도주에 성을 내고 있었다.
지금 나의 나이 37살. 시원한 맥주의 즐거움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때의 나의 나이였던 아빠가 생각이 난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들어와 정성스레 숙성시킨 포도주 한 잔의 기쁨을 내가 망쳤던 것이다. 고된 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아빠의 유일한 즐거움을 내 실수로 빼앗아 갔던 것이다. 여름밤이면 그때의 아빠가 생각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이후 매년 포도주를 담글 때마다 나를 보며 먹어도 되니까 물은 붓지 말라고 놀렸었던 아빠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