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연구 - 제1권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은 1831년 8월 《고슬랭-카넬(Gosselin et Canel)》 출판사에서 초판이 발간되었다. 1834년에 《베르데(Werdet)》 출판사에서 「철학적 연구(Études philosophiques)」로 분류되어 발간되었다. 이후 일곱 차례에 걸쳐 모음집 속에 묶여서, 혹은 단행본 형태로 재발간되었는데, 발간될 때마다 부분적으로 수정되고 보완되다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퓌른》에서 총 열여섯 권의 『인간희극』이 출간될 때 다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열네 번째 권에 수록되었다. 이후로도 수정 작업은 계속되어 발자크는 이미 발표된 〈나귀 가죽〉을 고치고 또 고쳐 무려 1300군데가 수정되었다.
〈나귀 가죽〉은 『인간희극』의 「철학적 연구」의 맨 앞자리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으로, 발자크는 『인간희극』의 서문에서 “「철학적 연구」의 첫 번째 작품인 〈나귀 가죽〉은 거의 동양적인 판타지의 고리로 「풍속생활 연구」와 「철학적 연구」를 잇는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삶 그 자체가 모든 열정의 원칙인 욕망과 드잡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각별히 언급하고 있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친 프랑스는 더 이상 예전의 프랑스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후 들어선 복고왕정(1814~1830)은 대혁명 이후의 변화를 부정하며 국면을 구체제로 되돌리려 한다. 귀족 정치와 노인 정치의 부활을 꾀한 이러한 반동적인 정책은 부르주아 계급과 젊은 세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이 주도한 1830년 7월 혁명은 입헌왕정 체제인 ‘7월 왕정(1830~1848)’을 낳는다.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7월 왕정의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리프는 이제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왕’ 혹은 ‘시민 왕’으로 불린다. 7월 왕정은 프랑스가 산업혁명을 겪으며 산업자본주의 체제로 재편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대혁명 이후 급신장한 시민의 권리의식과 변화의 열망을 수용했어야 할 7월 왕정은 그러나 산업과 금융 자본가 같은 상층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금권정치 체제로 고착된다. 7월 왕정은 급증한 도시 노동자 계급과 하층 부르주아 계급의 저항을 불러 결국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격변기를 살아간 당시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해갈 것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현실이 턱없이 불만족스럽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인식했다. 〈나귀 가죽〉은 처음부터 끝까지 라파엘 드 발랑탱(Raphaël de Valentin)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발자크는 주인공 라파엘과 그 친구들의 묘사를 통해서 1830년 7월 혁명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즉 혁명에 걸었던 진정한 희망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거대한 자본과 그 자본에 매수된 언론이 판치는 사회, 사회정의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개인의 이기주의만이 팽배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귀 가죽〉의 인물들에게 1830년 7월 혁명으로 배태된 7월 왕정은 “민중의 영웅적 봉기에 의해 전복된 불명예스러운 왕정”이 “왕정이라는 요술공기 속에 입헌이라는 요술 공을 감추고 부리는 마술”에 지나지 않다. 7월 혁명이 심어준 변화는 소실되고, 앞으로 와야 할 것은 아직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자각이 바로 당시 젊은이들이 앓고 있던 이른바 ‘세기병’의 원인이었다.
발자크는 이러한 당시의 전형적인 젊은이들의 삶에 마법의 가죽이라는 환상적인 요소를 개입시킴으로써 현실과 초월의 균형을 취함과 동시에 과도한 욕망에 의한 인간의 파멸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표면이 오톨도톨한 짐승의 가죽인데 금속판처럼 단단하게 보이다가도 금세 부드러워져 점액질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 가죽은 물에 젖거나 불에 타거나 부식되지 않으며, 어떠한 압력이나 타격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게다가, 표변에 산스크리트어로 “나를 가지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새겨져 있는 이 가죽은 이 가죽과 계약을 맺은 자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법의 가죽이다. 단, 소원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죽의 크기가 줄어들며, 이 가죽의 크기는 곧 가죽을 소유한 자의 여생을 의미한다. 요컨대 가죽의 힘으로 욕망을 이룬 자는 이룬 욕망의 크기만큼 목숨이 줄어들어 가죽이 소멸되는 날, 가죽을 소유한 자의 목숨도 소멸된다.
그러나 가죽을 소유한 라파엘의 파멸과 함께 발자크가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자본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정치도 언론도 사상도 그리고 사랑마저도 돈에 의해 좌우되는 한 사회의 모습이다. 발자크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가 “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철학소설을 시작하는 소설 중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후일 발자크가 펼칠 사회소설의 전개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1830년 10월 말, 그러니까 7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불안정하고 불안했던 시기의 어느 밤, 한 젊은이가 도박장으로 들어간다. 그 젊은이는 마치 죽음을 느끼게 하는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가 들어간 도박장 역시 음울하고 괴상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도박장은 당시 파리의 악과 타락을 상징한다. 서로 먹고 먹히는 살벌한 장소인 그곳의 도박꾼들은 살인자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곳에서 마지막 금화를 걸었다가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죽음을 생각하며 센느 강변을 걷는다. 그러다 골동품 상점으로 우연히 들어간다. 이집트, 헤브라이, 그리스, 아이오니아, 로마, 인도 등지에서 공수한 온갖 고대 유물들을 보고 있자니 삶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이유를 더더욱 알 수 없어 그 어느 때보다도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수많은 번뇌로 깊은 몽유 상태에 빠져 기진맥진한 그의 눈앞에 “마치 무덤에서 나온 듯한” 노인이 마술처럼 출현한다. 유령 같은 이 노인은 묘한 분위기의 준엄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젊은이를 꿰뚫어보듯 뜯어본다. 노인은 젊은이가 오로지 죽음을 원한다는 걸 알고는 나귀 가죽을 보여준다. 아주 공들여 닦아 윤을 낸, 표면이 오톨도톨한 유피 한 조각에서 “마치 혹성처럼”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진다. 가죽 표면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만일 그대가 나를 소유하면 그대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그대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원하라. 그러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상감되어 있다.
노인은, 인간은 두 가지 본능적인 행위에 의해 그 존재 원천이 고갈되고 기력이 소진되는데, “그것은 바로 ‘바람’(voulor)과 ‘행함’(pouvoir)”이라고 말한다. “바람의 행위는 우리를 서서히 불태워 없애고, 행함의 행위는 우리를 일거에 파괴”시킨다. “하지만 ‘앎’(savoir)은 유약한 우리의 심신 구조를 항구적인 평온 상태로 유지시킨다.” 그러므로 욕망이나 바람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사유를 통해 그것을 근절시켜야 하니, 삶을 쉽사리 망가뜨리는 심장이나 감각에 맡기지 말고 두뇌에 맡겨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나귀 가죽이야말로 인간의 멈출 줄 모르는 욕망과 무절제를 촉발하는 “행함과 바람의 결합”이니 경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헤매던 젊은이로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기에 욕망하는 만큼 줄어드는 생이란 차라리 감미로울 따름이다. 젊은이는 일찍이 공부하고 사유하는 데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었지만, 공부도 사유도 일용할 양식조차 가져다주지 못했으니, 이제는 바람이나 행함으로 도를 넘어 살아보고 싶다며 가죽을 움켜쥐고는 온갖 쾌락과 뜨거운 열정이 들끓는 향연을 열어달라고 기원한다. 노인은 이로써 계약이 성사된 거라며, 그의 소망은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만큼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자 요상한 노인에게 우롱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젊은이는 문득 노인이 댄서와 사랑에 빠져 환락이 주는 행복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해달라고 가죽에 대고 기원한다. 그리고는 노인의 깊은 한숨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재빨리 골동품 가게를 빠져 나가 내달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가죽은 그가 무의식중에 호주머니에 손을 넣자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호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라파엘은 골동품 가게를 빠져나오자마자 세 명의 젊은이와 부딪힌다. 그들은 라파엘을 단박에 알아보고 반색한다. 그들 중 한 친구가 7월 왕조의 실권이 이제 귀족으로부터 부르주아로 넘어갔다고, 그러니 실권자가 된 자본가들은 이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이 아닌 언론인들의 도움을 필요한 시국이라고 한참을 떠들어대더니, 그래서 그들은 신문을 통해 여론에 분칠을 해 공화주의자들을 들쑤셔 부추기고 보나파르티스트들은 부각시키고 중도파에게는 다시 양식을 제공할 작정이라고 설명하고는, 바로 그 신문의 설립자가 베푸는 연회에 라파엘을 데리고 가려고 그를 찾아 헤맸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들은 7월 혁명이라는 어지러운 시국을 기회로 삼아 재빨리 언론인들과 손을 잡고 부와 향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라파엘은 정말 마법이 일어나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윽고 금빛과 불빛으로 휘황찬란한 대향연장에 들어선다. 그곳에는 당시 파리에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적으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젊은이들이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 모여 앉아 술과 음악, 그리고 화려한 의상과 미모의 여자들이 제공하는 향연을 누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다. 잔들이 날아가 깨지고, 소리 지르고, 휘파람 불고, 노래하고, 울부짖고, 얼굴을 붉히며 으르렁대고, 끔찍스런 웃음이 난무해 이제 말소리들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술과 환락과 떠들어대는 소리로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 방탕의 술판이 벌이는 작태들 속에서 라파엘은 문득 웃음이 터졌다. 그러더니, 곁에 있던 신문기자 친구 에밀(Émile)에게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라파엘이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엄한 훈육으로 그에게 법학 공부를 종용했다. 새벽 다섯 시부터 온종일 법학 수업을 들었고, 법무사 사무실에 실습도 나갔다. 그렇게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수도승 못지않게 냉혹한 아버지의 독재 아래 짓눌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법무사 사무실로, 법과대학으로, 재판정으로 끌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사촌의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무도회장에서 아버지는 라파엘에게 지갑을 맡겼다. 한창 혈기왕성한 스무 살의 라파엘은 아버지의 지갑에서 두 개의 금화를 꺼내 들고 도박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도박에서 이겨 160프랑을 손에 쥐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에게 이제는 성인이니 매달 100프랑의 용돈을 줄 것이며, 그동안 성실하게 익힌 법학으로 변호사나 공증인이 아니라 정치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자신이 소유권 인정 싸움을 벌이고 있던 거대한 재판의 미로 속에 라파엘을 밀어 넣었다. 라파엘의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고, 대혁명 전에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아버지는 나폴레옹 제정 치하에서 한 명문가의 상속녀와 재혼했다. 나폴레옹 황제가 자기 휘하의 장군들에게 하사했던 토지들 중 여러 곳을 구입해두었던 아버지는 왕정복고로 인해 불운한 증여재산이 되어버린 그 토지의 소유권을 부인하는 외교관들과 재판소에 맞서 소유권 인정을 위해 10년도 넘게 재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위해 라파엘은 밤낮으로 공부하고, 정치인들을 만나러 다니고, 거짓 설명으로 그들을 속이려 애쓰고, 그들의 부인, 하인, 심지어 그들의 개에게도 환심을 사야 했다. 라파엘은 젊은 날의 쾌락이나 즐거움을 희생하고 아버지의 사업과 가문의 짐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러나 토지소유 자격상실에 관한 황제의 칙령이 발견되어 파산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라파엘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매각했다. 빚을 모두 갚고 나서 열 달 만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친척도 후견인도 없이 척박한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소심하고 서툴렀던 그는 여자들에게도 전혀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줄기차게 이어온 철학적 호기심과 엄청난 공부와 독서열 덕분에 그는 지식의 드넓은 영역으로 전진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식세계의 지존으로 군림함으로써 세상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로 결심하고, 언젠가 만나게 될 여인을 고대하며 고독 속에서 공부에 전념했다. 그의 수중에는 모든 빚을 청산하고 남은 1112프랑이 전부였기에 파리의 초라한 하숙집에서 수도승처럼 가난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며 돈과 명성을 안겨줄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3년 동안 위대한 사상에 매달려 밤낮없이 공부하고 집필했다.
하숙집 여주인의 딸 폴린(Pauline)이 그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그의 식사며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폴린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근위대의 기마 포병대대 대대장이었는데, 베레지나 퇴각 때 그만 포로가 된 이래 행방이 묘연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폴린의 처지를 알게 된 라파엘은 폴린의 교육을 맡겠다고 자처했다. 폴린을 교육하면서 라파엘은 서서히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 매혹적인 폴린의 모습에 점차 마음을 빼앗겼지만, 자신과 그녀의 가난 때문에 쉽사리 다가서지 못했다.
1829년 12월 초순경에 라파엘은 우연히 라스티냑(Rastignac)을 만났다. 라스티냑은 라파엘이 처박혀 공부에만 매진해봤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라면서 일단 사교계로 나가서 아무데고 마구 들이대야만 자리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설교한다. 신나게 삶을 즐기면서 빚도 지고 방탕하게 살다보면 오히려 명성도 얻고 혼처도 얻고 재산도 생기는 게 바로 세상의 역설이라고 떠벌인다. 그리고는 라파엘을 사교계에 소개해주겠다며 바로 다음 날 막대한 연금을 받는 아름다운 페도라(Fœdora) 백작 부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전직 장관들과 상원의원들, 학자들과 문인들이 주류인 그곳에서 라파엘은 그동안 열렬히 공부한 학식으로 심오하고 신랄하게 토론을 주도해 페도라의 환심을 샀다. 라파엘은 우아하고 관능적인 페도라의 매력에 흠뻑 취해 그녀를 정복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페도라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한껏 고양된 나머지 라파엘은 자제할 수 없을 만큼 미친 듯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는 석 달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소비해야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란 요원하기만 했다. 결국 빈털터리가 된 라파엘은 하숙집을 나와야 했다. 그러나 하숙집 모녀는 그냥 머물러도 된다며 그를 붙잡았다. 그는 모녀에게서 그토록 갈망해온 따뜻한 정을 느꼈다.
다음 날 라파엘은 라스티냑을 통해 출판업자 피노(Finot)를 소개받았고, 그에게서 역사 회고록을 대필하는 일을 의뢰받았다. 그리고는 라스티냑의 주선으로 은행 구좌를 터서 대출을 받아 본격적인 방탕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페도라를 위해 소비했다. 페도라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무정한 여인이었기에 주변의 남자들을 돌아가면서 즐길 뿐,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라파엘은 결국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고, 이를 눈치 챈 하숙집 모녀가 대주는 돈으로 연명하면서도 끝없이 페도라를 욕망하고 가진 돈을 모두 그녀에게 탕진했다. 어느 날, 라파엘은 작심하고 페도라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페도라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우정뿐이라고 일축했다.
라파엘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안고 하숙집 다락방에만 처박혀 회고록을 완성해 피노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라스티냑을 만났다. 라스티냑은 페도라 때문에 다 죽어가는 라파엘을 보더니 그럴 때는 도박장이 해답이라고 부추겼지만, 라파엘은 라스티냑에게 100에퀴를 주며 혼자 가라고 보냈다. 그리고는 하숙집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쓰고 받은 원고료로 폴린에게 여섯 달치 집세를 셈해준 뒤 이별을 고하고는 황급히 하숙집을 빠져 나왔다.
라파엘은 짐을 들고 라스티냑의 집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한참 뒤 라스티냑은 금화가 가득 찬 모자를 들고 춤을 추듯 들어왔다. 그는 라파엘이 건넨 100에퀴로 2만 7천 프랑을 따왔다. 두 사람은 그 돈을 밑천으로 다시 쾌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향락과 방탕의 진수를 맛보며 몰아의 도취에 빠져 지내다 마침내 가진 돈이 바닥났다. 라파엘은 어차피 죽을 작정이었기에 단기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고, 곧이어 지불 날자가 도래했다. 그런데 약속어음의 지불기일 전날 밤에 한 투기꾼이 그를 찾아와 그의 소유로 되어 있는 루아르 강의 섬을 자기에게 팔라고 제안했다.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섬이었다. 라파엘은 섬을 팔았고, 그 돈으로 빚을 다 갚고 2천 프랑이 남았다. 그 돈이면 다시 학자의 평온한 삶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라파엘의 영혼은 이미 허영으로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결국 그는 2천 프랑이 다 떨어질 때까지 다시 창녀와 술과 맛난 음식들에 취해 살았다. 그러다 또 다시 맞닥뜨린 절망의 나락에서 나귀 가죽을 만났던 것이다.
긴긴 이야기를 마친 라파엘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호주머니에서 나귀 가죽을 꺼내 든다. 그리고는 가죽을 흔들며 백만장자가 될 거라며, 백만장자가 되어 전 세계에 대고 복수할 거라고 위풍당당하게 외친다.
다음 날 아침, 다들 전날 밤의 질탕한 술자리를 대변하는 추한 얼굴로 아침식사를 하러 모인 자리에 공증인 카르도(Cardot)가 라파엘에게 어머니의 처녀 시절 성이 오플라르티(O’Flaharty)냐고 묻는다. 라파엘이 심드렁하게 그렇다고 대꾸하자, 카르도는 라파엘이 1828년 8월 콜카타에서 사망한 오플라르티 사령관의 유일무이한 상속자라고 외친다. 사령관이 유서를 통해 몇몇 공익 재단에 여러 차례에 걸쳐 유산을 기부했는데, 프랑스 정부가 그의 유산에 대한 정산을 요구해 이제야 그 유산이 환금되어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라파엘은 경악하여 벌떡 일어섰다가 문득 가죽을 꺼내 크기를 확인해본다. 그러고는, 가죽의 크기가 줄어든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다.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게 되었다.
12월 초순경, 빗줄기가 쏟아지는 거리에 70대 노인 하나가 집집마다 문패를 확인하며 라파엘 드 발랑탱 후작의 거처를 찾고 있다. 노인은 과거에 중등반과 고등반에서 라파엘을 가르쳤던 포리케(Porriquet) 교수였다. 라파엘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던 그날 이후 대저택을 구입해 칩거에 들어갔다. 그 어떤 욕망도 억제하기 위해서 누구도 만나지 않고 간결하고 규칙적인 생활만을 고집하며 독서에만 열중했다. 라파엘을 접견한 포리케 교수는 7월 혁명 이후 자신이 받은 박해에 대해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라파엘은 그칠 줄 모르는 그의 이야기에 지친 나머지 무심코 교수의 성공을 기원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라파엘은 갑자기 펄쩍 일어나 아연실색한 얼굴로 나귀 가죽을 확인했다. 가죽은 어김없이 줄어들어 있었다. 라파엘의 얼굴이 분노로 새하얗게 질리더니 교수와 집사를 향해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그러더니 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포리케는 라파엘이 간질이라고 생각하며 돌아갔다.
그날 밤, 라파엘은 오페라를 관람하기 위해 이탈리아 극장에 갔다가 낯익은 노인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노인은 바로 나귀 가죽을 건네준 골동품상이었다. 노인 곁에는 교태로운 무희가 달싹 붙어 있었다. 라파엘의 기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라파엘이 노인에게 노인의 고매하고 엄격한 철학은 어쩌고 이러고 있냐고 빈정대자 노인은 “청년이 된 듯 행복하다”며 “한 시간의 사랑 속에 한 인생 전체가 담겨 있다”고 대답했다.
노인과 헤어진 라파엘은 제자리로 돌아가다가 페도라를 발견했다. 라파엘은 새 파트너에게 교태를 부리는 그녀를 한심스러운 듯 경멸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페도라는 라파엘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얗게 질렸다. 그의 경멸의 눈초리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2막이 열릴 즈음, 한 여인이 들어오더니 라파엘의 옆 칸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를 주목하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그 미지의 여인은 놀랍게도 폴린이었다. 백합처럼 흰 피부의 폴린은 단아하고 우아한 몸가짐으로 그에게 인사하더니 내일 하숙집에 들러달라고 청하고는 황급히 나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라파엘은 폴린의 완벽한 모습을 지우지 못해 괴로워 하다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근심스런 마음으로 가죽을 바라보며 폴린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외쳤다. 그리고는 폴린을 만나러 갔다.
놀랍게도 하숙집 여주인은 이제 남작 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하숙집은 다른 여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폴린의 반가운 표정을 보자 라파엘은 만감이 교차하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폴린은 라파엘의 애절한 눈물을 보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서로를 포옹한 채 열렬한 입맞춤을 나눈 뒤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폴린은 한없이 행복해 했고, 라파엘은 한없이 참담해 했다.
두 사람은 3월 초순경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하고 사랑의 행복에 온몸을 맡기며 한 몸이 되어 흉금을 터놓고 살았다. 2월 말경이 되자 라파엘은 눈에 띄게 시들어갔다. 참담한 고뇌의 얼굴로 시들어가던 라파엘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폴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 과학의 힘을 빌어보기로 결심했다.
라파엘은 나귀 가죽의 정체와 자신의 병을 규명하기 위해 당대의 모든 과학적 지식체계, 즉 동물학, 물리학, 화학, 기계 역학, 그리고 의학에 문의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가죽의 정체를 규명해주지 못했다. 라파엘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지식이 실체적인 사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고작 명목뿐인 이름만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과학자들 앞에서 라파엘은 “실체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름을 지어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라고 외친다.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압착기에다 가죽을 늘려 보려는 수학자의 시도도, 화학적으로 분해하고자 하는 화학자의 노력도 모두 실패한다. 가죽에는 악마적인,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한다. 라파엘은 절망하여, “그 속에는 무언가 악마적인 것이 존재함이 틀림없어. 어떠한 인간의 능력도 나에게 단 하루를 더 살게 해주지 못하는구나!”라고 외친다.
결국 라파엘은 궁여지책으로 저명한 의사들의 충고에 따라 파리를 떠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온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온천 휴양지 역시 작은 규모의 사회이기에 쇠약하고 불행한 그를 추방시키려 한다. “사회는 고뇌에 찬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을 몹시 혐오하여 그들을 전염병만큼이나 두려워하고 그들과 악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악인을 택한다. 악은 일종의 호사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황금과 멸시를 먹고산다.” “돈이나 권력이 없다면 육체나 정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는 누구라도 하나의 불가촉천민이다.” 그리하여 라파엘은 “남보다 능력 있고 우월한 자들이 이 땅에서 받는 대접인 그 소름 끼치는 고립 상태에 갇혀버렸다.”
“그는 문득 힘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무리 그 힘이 막대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홀은 어린아이에게는 한갓 장난감일 뿐이지만 리슐리외에게는 도끼요, 나폴레옹에게는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인 것이다.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 가지며 그래서 큰 사람만을 더 키우는 법이다. 라파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온천 휴양지를 떠나 사회와 완전히 절연된 원시 상태의 오베르뉴(Auvergne) 벽촌에 틀어박힌다. 그는 “자연의 은밀한 움직임과 동화되고 자연의 수동적 복종에 완전히 일치된” “식물적인 삶” 속에서 욕망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은신처로 삼은 시골집 가족의 동정심을 견딜 수 없다.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 바로 동정심이다.” “동정심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고 약점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며, “아첨의 외양을 한 악의이거나 온화함 속에 감춰진 경멸이거나 아니면 공격성을 은폐한 온화함”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파리의 자기 집으로 돌아온 라파엘은 집사에게서 그동안 폴린이 보내온 편지 뭉치를 받는다. 자신에 대한 가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토로한 그녀의 편지들을 라파엘은 참담한 심정으로 벽난로 안으로 던져 태워버린다. 욕망의 저주를 잘 아는 라파엘로서는 폴린을 피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의사에게 온종일 잠만 잘 수 있도록 아편 섞은 약을 조제해달라고 청한다. 온종일 잠만 자면 그 어떤 욕망도 피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밤에 잠든 그의 머리맡에 폴린이 찾아든다. 서로 헤어져 고통을 겪었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폴린을 보자 라파엘은 어안이 벙벙했다. 라파엘은 나귀 가죽을 꺼내 폴린에게 건네며 이제 작별할 시간이라고 말한다. 나귀 가죽은 이내 바스러질 것처럼 작아져 있었다. 라파엘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폴린의 모습에 더 이상 정열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정열이 그를 사로잡았고 사랑에 취한 라파엘은 폴린을 끌어안는다. 그러나 자신의 손아귀에서 점점 줄어들어가는 가죽을 보며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폴린은 옆방으로 달아나 문을 잠근다. 폴린은 라파엘의 생명을 구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른 라파엘은 가공할 힘을 발휘해 문을 부수고 들어가 폴린을 품에 안는다. 라파엘은 폴린을 품고 자신의 마지막 욕망을 완전히 소진시켜버린 뒤 폴린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폴린과 페도라는 도처에 존재한다. 폴린은 매혹적인 열정과 완전한 욕망이자 완전한 고통이면서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형상을 한, 한없이 덧없는 환상이고, 페도라는 바로 사회이다.
1828년 이후 프랑스에는 환상문학이 성행하였다. 19세기의 프랑스는 산업화와 과학의 발전으로 사회가 급속히 변화하던 시기였다. 과학에 의한 인류발전이라는 신념은 확고한 것이었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모든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과학적 실증주의가 팽배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던 바로 그 시기에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환상소설이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과학이 부여하는 확실성에 한계를 느낀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에 주목하면서, 설명 불가능한 그 무엇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19세기에 낭만주의와 더불어 신비주의와 비교주의가 성행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반영한다.
발자크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초기작품에는 환상적 요소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흔히 발자크는 19세기 중반기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발자크가 글을 쓰기 시작하던 1820년경부터 1832년경까지 발자크의 관심은 주로 철학적인 것이었고 환상성은 그의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수단이었다. 발자크는 1830년에서 1832년 사이에 많은 환상적 이야기들을 발표하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철학적 연구」 속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환상소설은 발자크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당시의 유행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환상적인 요소는 현실적 삶의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발자크가 환상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은 자본화되어가는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사회이다. 즉 발자크에게 있어 환상과 현실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서로 뒤섞여 존재하는 것이다.
〈나귀 가죽〉의 환상성은 단지 이상한 글씨가 쓰여지고 악마를 연상시키는 부적이라는 사물의 효과만이 아니다. 처음 도박장의 묘사로부터 골동품 상점의 다양한 물건들이 주는 놀라운 효과, 대향연의 무질서가 주는 현기증 나는 분위기, 그리고 라파엘의 으리으리한 저택과 그의 죽음까지 환상적인 분위기는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성 있게 흐른다.
한편, ‘철학 소설’ 혹은 ‘테제 소설’로서 〈나귀 가죽〉이 전달하려고 하는 주제는 비교적 간명해 보인다. 삶에 절망하여 자살을 결심한 라파엘에게 주어진 신비한 가죽은 가죽의 소유자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지만 그 대가로 소유자의 목숨을 단축시킨다. 다시 말해 ‘가죽’은 한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생의 에너지’의 총량으로서 그 에너지를 아껴 쓰면 오래 살고 낭비하면 일찍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욕망의 억제를 통한 삶의 지속을 설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귀 가죽〉이 담고 있는 철학은 단순히 ‘욕망의 무절제’에 대한 일갈이 아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죽음을 부른다면, 욕망의 억제는 존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열정적인 삶, 삶다운 삶을 위한 욕망이 존재의 파멸을 불러온다는 의미에서 ‘삶 속의 죽음’이라면, 존재의 지속을 위한 욕망의 억제는 그 존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죽음 속의 삶’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그 결말은 항상 동일한 숙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귀 가죽〉의 역설은 바로 삶에 대한 욕망이 삶의 파괴를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과 자신을 지속시킨다는 것이 서로 모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나귀 가죽〉이 형상화하는 철학은 상투적인 금욕론이나 지혜론의 답습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운명적으로 내재한 이러한 역설과 모순의 발견이다.
〈나귀 가죽〉에 구현되고 있는 모순적인 인간의 조건은 발자크가 평생 붙들고 있던 일종의 화두였다. 〈나귀 가죽〉의 모순은 작가가 오래전부터 진지하게 수행해온 시대적 고찰의 집적물이며, ‘나귀 가죽’의 모순은 작가가 파악한 시대의 모순이기도 하다. 독자가 ‘나귀 가죽’의 모순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시대나 장소에 따라 해소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 모습을 달리한 것일 뿐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다만 〈나귀 가죽〉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이란 당대의 구체성에 뿌리가 닿아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라는 역설이다.
나귀 가죽의 신비를 당대의 과학에 문의했다가 무력한 과학 앞에서 절망하는 라파엘의 외침은 당시 절대적인 믿음으로 존재하던 합리적 사고와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에 대한 고발인 동시에 인간은 운명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냉소적 표현이다. 가죽은 그것이 함축한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지속을 바쳐야 한다”는 모순으로써 “삶에 의해 부추겨졌지만 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비극을 낳은 7월 혁명 이후의 시대적 모순을 구현하는 한편, 좀 더 직접적으로는 7월 왕정 체제의 핵심인 ‘황금-화폐’를 가리키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되 이루어질 때마다 그 크기가 줄어든다는 가죽의 계약 조건은 후일 정치경제학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가장 발달된 교환가치 형태인 화폐의 거래 기능을 은유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가죽의 크기가 가죽 소지자의 생명을 가리킨다는 것 역시 사용가치를 대신하는 화폐의 교환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가죽은 화폐처럼 ‘가치’를 환유(換喩)적으로 표현하고 ‘거래’를 은유적으로 비유한다.
물신으로서의 ‘황금-화폐’의 권능은 사용가치를 대신한 교환가치의 권능이다. 발자크가 “명예의 원칙을 대신한 돈의 원칙”이라고 부르기도 한 그 정치경제학의 용어를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의미를 대신한 기호의 권능, 혹은 사물(의 본성)을 대신한 말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귀 가죽〉의 폴린과 페도라의 관계는 이런 점에서 의미가 거세된 기호, 자족하기만 하는 기호가 지배하는 세상을 뛰어나게 형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죽에 사로잡히기 이전의 라파엘의 고백과 가죽에 사로잡힌 라파엘의 드라마에서 폴린이 여성의 본래 ‘의미’와 통하고 페도라는 여성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기호’를 대변한다. 그런데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듯이 ‘폴린-의미’는 어느덧 환영이 되어 허공을 떠돌고, 반면 ‘페도라-기호’는 하나의 사회로서 현실의 어디에나 존재한다. 라파엘의 드라마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호-화폐-페도라’에게서 소외되고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의미-가치-폴린’을 끌어안고 죽는 모든 현대인의 드라마이다.
▶ 발췌 논문 : 〈발자크 작품에 나타난 환상의 의미 - 『마법의 가죽』과 『회개한 멜모트』를 중심으로>,
송기정(이화여대)
▶ 참고 문헌 : 〈나귀 가죽〉, 발자크 저, 이철의 역, 문학동네
▶ 작품 배경 / 줄거리 / 분석 모두 상기 발췌 논문 및 문헌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 및 인용한 것입니다.
▶ 볼드 처리된 문장은 논문 작성자 혹은 역자가 원작을 번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