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연구 - 제4권
〈미지의 걸작(Le Chef-d’œuvre inconnu)〉은 1831년 8월에 〈위대한 화가 프레노페르(Maître Frenhofer)〉라는 제목으로 《아티스트(L'Artiste)》 지에 발표된 후, 같은 해에 〈카트린 레스코, 환상적인 이야기(Catherine Lescault, conte fantastique)〉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잡지에 다시 실린다. 이후 1837년에 일부 추가되고 수정되어 「철학적 연구(Études philosophiques)」에 포함되어 출판되었고, 1846년에 『인간희극』에 통합되었다.
이 소설의 집필 연도는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와 동시대인 1832년이지만 소설 속의 시대 배경은 렘브란트(Rembrandt),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루벤스(Rubens) 등이 살았던 17세기이다. 그러나 소설 속 화가들이 참조하고 있는 그림 기법은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회화사는 세 시대를 아우르며 서로 중첩되고 있다.
1612년 말경 12월의 어느 추운 날 아침, 초라한 외모의 한 청년이 파리의 그랑-조귀스탱(Grands-Augustins) 가에 있는 어느 집 앞을 서성였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그 집 문턱을 넘어 프랑수아 포르뷔스(François Porbus) 선생님이 계신지 물었다. 아틀리에 안에는 루벤스 때문에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s)에게서 버림받은 앙리 4세(Henri IV)의 화가가 일하고 있었다. 청년은 앙리 4세의 훌륭한 초상화를 두 번이나 그린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기에 앞서 감동과 경외로 가슴이 두근거려 아틀리에로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계단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어떤 노인이 계단을 올라왔다. 얼굴에 무언가 악마적인 것이 서려있는 노인은 청년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는 아틀리에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마흔 살 가량의 포르뷔스(Porbus)가 노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노인이 청년을 데리고 온 거라고 생각하고 청년도 함께 아틀리에로 들였다.
노인은 아틀리에 안에 늘어선 그림들 중에 ‘이집트인 마리아’를 사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네의 성녀는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좋고, 여백의 정감이 정확히 지켜져 있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육체에 따뜻한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 자네의 창작은 불완전해.”라고 비판했다. 포르뷔스가 그 이유를 묻자 노인은, “자넨 두 체계 사이에서, 데생과 색깔 사이에서 망설였고, 섬세한 냉정함, 즉 옛 독일 대가들의 정확한 엄격함과, 눈부신 열정, 즉 이탈리아 화가들의 알맞은 풍성함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망설였네.”라고 지적하며, 그래서 데생도 채색도 완전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결국 진실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포르뷔스가 노인에게, 캔버스에 더 이상 옮길 수 없는 진실성도 있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반박하자 노인은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이야! 자넨 비열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란 말일세!”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인은 무릇 예술가라면 사물과 존재의 정신, 영혼, 용모를 포착하여 제시해야 하는 사상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확장시켜야 하는 존재이며, 결과와 원인을 한꺼번에 담아내야 한다고, 그게 진짜 싸움이라고 역설했다. 그렇게 한참을 포르뷔스의 그림에서 결여된 내적 생명력에 대해 역설한 끝에 노인은 그 점을 제외하면 루벤스의 그림보다 훨씬 낫다고 평했다.
곁에서 노인의 기나긴 역설을 함께 듣고 있던 청년이 더는 참지 못하고 “하지만, 이 성녀는 숭고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두 화가는 그제야 청년이 누구인지 물었다.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은 무명 화가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포르뷔스가 청년에게 크레용과 종이를 주면서 한 번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청년이 마리아의 윤곽선을 민첩하게 그려내자 노인은 감탄하더니 이름을 물었다. 청년의 이름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이었다. 노인은 청년이 배울 만한 자격과 이해할 능력이 있으니 직접 가르쳐주겠다며 팔레트와 붓을 들고는 청년의 그림에 서너 번의 덧칠과 색을 가했다. 노인의 붓칠은 너무나 적절했기에 그림은 빛으로 가득 찬 새 그림이 되었다. 노인은 몹시 급격한 동작으로 너무나 빨리 진행했기 때문에 젊은 푸생에게는 “마치 그 기이한 인물의 육체 안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노인은 붓칠을 멈추더니 유쾌하게 그의 데생을 사겠다며 지갑을 꺼내 금화 두 닢을 푸생에게 건넸다.
노인의 제안으로 세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푸생이 노인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고 경탄하는 동안 포르뷔스는 노인에게 노인의 작품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노인은 무척 흥분하며 아직은 한참 미완성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더니 노인은 “인간이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이해하는 방법이 바로 선”인데, “모든 것이 가득 찬 자연에는 선이 없다”고, 그래서 “사물을 그것이 놓인 배경에서 떼어냄으로써 데생을 하는 것”이므로 “빛의 분배만이 육체에 외관을 부여”한다고, 그래서 자신은 윤곽선을 계속해서 그리고 있으며 작업을 한 지 십 년이 되었지만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고 열변을 토했다. 요컨대, 데생보다는 색체에 우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열변 끝에 노인은 갑자기 깊은 공상에 빠져 침묵했다.
푸생은 노인이 혼란스런 수많은 생각들이 생겨나는 그 어떤 미지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환상적인 천재로 보였다.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에 대한 노인의 경멸, 노인에 대한 포르뷔스의 경의, 그리고 무려 십 년 동안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온, 천재적인 노인의 그 인내의 작품 등, 푸생으로서는 노인을 둘러싼 모든 것이 초자연적으로만 여겨졌다. 말하자면 푸생에게 있어 노인은 “비밀과 격정과 공상을 갖춘 예술 그 자체가 되었다.” 노인의 이름은 프렌호퍼(Frenhofer)였다. 프렌호퍼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갖춘 완벽한 신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예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화가 프렌호퍼는 그의 걸작과 함께 살았다. 그것은 한 여자의 초상화였다. 그에게는 그 초상화의 여인 카트린 레스코(Catherine Lescault)가 자기의 아내와 마찬가지였기에 다른 남자의 눈에 드러나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여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작품의 질에 대해 마지막 의혹을 품고 있는 그는 그것을 완벽한 모델, 이상적인 비너스와 비교해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아시아에 가면 그런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프렌호퍼를 두고 집을 나오며 포르뷔스는 푸생에게 저 숭고한 화가의 천재적 재능을 찬탄하면서도, 프렌호퍼가 지나치게 생명력을 추구하며 과도한 사유를 통해 작품을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저렇듯 오랜 시간 방황만 하느라 예술의 절대적 진리에서 오히려 멀어져버린 거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화가란 손에 화필을 들고서만 숙고해야 한다”며, 푸생에게 프렌호퍼를 모방하지 말고 작업을 하라고 경고했다.
푸생은 포르뷔스와 헤어져 애인인 질레트(Gillette)의 집으로 갔다. 푸생은 자신의 재능에 이끌려 파리에 와서 어느 날 질레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푸생의 위대한 영혼과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의 가난과 예술가적 변덕을 받아들였다. 질레트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귀엽고 쾌활하며 순종적이면서도 영혼이 아름다워, 모든 여성적 풍요를 갖추고 있는 여인이었다. 푸생은 질레트에게 프렌호퍼의 그림 모델이 되어달라고 간청했다. 질레트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그녀를 내보인다는 건 푸생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푸생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더니 이내, 프렌호퍼는 한낱 노인일 뿐이고, 그는 그녀 안에 있는 여자만을 볼 거라고 다시금 간청했다. 질레트는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며 그건 자신이 파멸하는 길일 거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잠시 후, 결국 푸생의 예술적 열정을 위해 그의 청을 수락했다. 푸생이 돌아간 뒤 질레트는 푸생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그 어떤 공포에 사로잡혔다.
석 달 후, 포르뷔스는 프렌호퍼를 만나러 갔다. 프렌호퍼는 그의 신비스런 그림을 끝내 완성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깊은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의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현실의 모델과 대조하여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뿐이었기에 그는 그림 속의 여자와 대결할 만한 현실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포르뷔스는 프렌호퍼에게 푸생의 연인인 질레트가 지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를 모델로 써보시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들에게도 프렌호퍼의 그림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자 자신의 그림을 자신의 여자이자 아내라고 여기는 프렌호퍼는 그건 끔찍한 매춘이라고 소리쳤다. 아내나 애인을 다른 남자한테 내어주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냐며 펄쩍 뛰었다. 이 순간, 노인의 눈에는 생기가 돌다 못해 광기가 돌았다. 프렌호퍼의 난폭한 태도에 질겁한 포르뷔스가 그럼 그만두시라며, 그러나 질레트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은 결코 찾지 못하실 거라고 확언했다. 그리고는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질레트와 니콜라 푸생이 프렌호퍼의 집 근처에 다다랐다. 질레트는 여전히 후회와 망설임을 떨치지 못했기에 푸생과 가벼운 언쟁이 오갔다. 이때, 프렌호퍼의 집 문이 열리며 포르뷔스가 나왔다. 포르뷔스는 질레트를 보자마자 그녀를 붙잡고 노인 앞으로 데려갔다. 질레트를 보고 프렌호퍼는 소스라쳤다. 푸생은 질레트의 은밀한 몸매까지 훑어내는 듯한 프렌호퍼의 감탄 어린 시선을 보자 비로소 후회가 막급했다. 푸생은 맹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질레트에게 돌아가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질레트는 푸생의 품안으로 달려들어, 안도감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이때, 프렌호퍼가 질레트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흥분한 포르뷔스가 푸생을 설득했다. 망설이던 푸생은 프렌호퍼를 향해 단검을 내보이며, 질레트가 단 한 마디라도 불평하게 되면 그 즉시 죽여 버리겠다고 호언했다. 푸생의 무시무시한 말과 침울한 태도에 위안을 받은 질레트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자기를 희생시키려드는 푸생을 용서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프렌호퍼의 걸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프렌호퍼가 열어 보인 캔버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만 한 포르뷔스와 푸생에게 프렌호퍼는 초자연적인 흥분에 사로잡혀 숨을 헐떡거리며 이 캔버스에는 너무도 많은 깊이가 있고, 또 너무도 진짜 같아서 그들이 그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그들은 캔버스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과 수많은 기이한 선들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캔버스의 구석에서 벗은 발 한 부분이 보였다. 겨우 발 한 쪽뿐이었지만, 그것은 매력적이고 살아 있는 발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감탄하며 아연실색했다. 포르뷔스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했다. 완벽한 예술을 추구해온 노화가의 과도한 성찰이 오히려 그림을 망친 결과로, 프렌호퍼의 캔버스에는 여인의 발 한 쪽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절대를 갈구한 프렌호퍼는 결국 그의 걸작을 서서히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포르뷔스와 푸생이 모든 걸 이해하고 프렌호퍼를 향해 돌아서자 프렌호프는 황홀경에 취해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완벽한 붓칠과 색조의 결합이 얼마나 진정한 빛을 얻어냈는지, 물감의 농담에 따른 형상의 윤곽이 데생이라는 인공적인 수단을 벗어나 어떻게 자연의 모습을 재현해냈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러자 포르뷔스는 프렌호퍼야말로 정녕 위대한 화가라며 “여기서 우리의 지상의 예술은 끝이 났다”고 평했다. 그러나 푸생은 프렌호퍼가 화가라기보다는 시인이라며, 조만간 캔버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푸생의 말에 프렌호퍼가 경악하더니 푸생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더니 포르뷔스에게 그도 자신의 그림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포르뷔스는 캔버스를 가리키며 프렌호퍼에게 직접 보시라고 외쳤다. 프렌호퍼는 잠시 동안 그림을 응시하다가 비틀거리더니 십 년 동안 작업했는데 아무것도 없다며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거만하게 일어서, 포르뷔스와 푸생에게 번득이는 시선을 던지고는, 자신의 그림을 훔쳐가기 위해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때, 한쪽 구석에서 질레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푸생을 사랑할 수 없다고, 푸생이 끔찍하고 경멸스러울 뿐이라고 말하며 절망했다. 그러는 사이에 프렌호퍼는 자신의 그림을 천으로 신중하게 다시 덮었다. 그는 두 화가에게 경멸과 의심이 가득한 음험한 시선을 던지고는 말없이 그들을 문 쪽으로 내몰아 집밖으로 내보냈다.
다음 날, 불안해진 포르뷔스가 프렌호퍼를 다시 만나러 왔을 때는 이미 그가 전날 밤에 그의 그림을 불태워버리고 자살한 후였다.
〈미지의 걸작〉은 『인간희극』의 2부인 「철학적 연구」에 속한다. 이 작품은 발자크의 소설 체계 내에서 〈강바라〉, 〈마시밀라 도니〉와 함께 예술 창조에 대한 연구 삼부작을 이룬다. 이 작품들은 사고의 파괴적 힘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명제가 예술 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가 지나치게 창조적 원칙을 강조하면 그로 인해 작품은 파괴된다는 것이다. 발자크에 의하면 사고는 반자연적인 것이고, 예술은 사고의 남용이기 때문이다. 〈마시밀라 도니〉와 〈강바라〉는 음악의 연주와 작곡의 경우를 보여주고, 〈미지의 걸작〉은 회화의 경우를 보여준다. 〈미지의 걸작〉의 줄거리는 푸생이라는 젊은 화가가 노대가인 프렌호퍼에게서 그림의 비밀을 배우는 대가로 자기의 애인 질레트를 그의 모델로 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적 콩트의 보다 큰 흥미는 포르뷔스, 푸생, 프렌호퍼 등의 화가들을 통하여 예술가의 초상화를 제시하고, 예술에 대한 이론의 단편을 제안한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에서 예술가에 대한 옹호의 정신도 읽을 수 있다.
〈미지의 걸작〉에 대해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발자크의 작품 체계 내에서는 철학적 콩트의 하나로 분류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미학적 교리문답이나 예술철학으로 보려는 의도가 앞선 나머지 콩트라는 낱말의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편의 제목은 푸생의 애인 ‘질레트’이고, 2편의 제목은 프렌호퍼가 자신의 애인으로 생각했던 그림 속의 여인의 이름인 ‘카트린 레스코’이다. 이들 제목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사랑’과 ‘예술’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발자크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1편의 제목인 질레트는 프렌호퍼의 누드 모델을 제안받자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누드 모델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잃는 것과 같다며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렌호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애인으로 생각했던 ‘카트린 레스코’ 그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포기하거나 매춘하는 행위로 여긴다. 이는 화가에게 있어서 사랑이 포함되지 않은 그림이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나 마네킹일 뿐, 진정한 예술은 아니라는 역설을 내포한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 내에서는 연인의 시선이 화가의 시선으로 변화하고 있고, 그러한 변모로 인해 화가는 사랑을 잃는다. 푸생이 사랑을 잃는 것은 그가 질레트를 프렌호퍼의 모델로 내주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고, 그 자신이 이미 그녀를 마음속에서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지의 걸작〉을 사랑에 빠진 한 예술가가 마음속으로 겪는 갈등의 드라마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푸생은 질레트를 잃음으로써만 카트린 레스코의 소유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카트린 레스코가 단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발자크는 미술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화가들과 미술 비평가들에게서 자료를 구했으며,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도 그를 도왔다. 발자크는 그림에서 자연의 표현을 보았다. 따라서 자연의 표현인 그림에서는, 데생과 색채가 서로 어울리면서 풍요로워지고, 원인과 결과가 조화롭게 맞물린다. 이 작품을 「철학적 연구」로 분류한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다. 발자크는 ‘절대 탐구’라는 중요한 주제의 본질적 양상을 탐색한다. 그것은 낭만주의 문학과 예술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러한 조물주적인 야심은 예술적 천재에게 초인적인 에너지와 의지를 요구한다. 더구나 그런 야심 때문에 에너지와 의지를 소진시키다 보면 목숨을 걸 위험까지도 감내해야 하며, 정열로 인해 불타버릴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 소진과 정열은 예술가를 광기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야말로 발자크 자신은 물론 그가 창조한 파우스트적 주인공의 운명이다.
▶ 참고 문헌 : 〈미지의 걸작〉, 발자크 저, 이철 역, 문학과 지성사
▶ 참고 사이트 : 〈19세기 불문학〉, 박정자, 2001학년도 1학기 상명대 불어교육과 강의록
▶ 참고 논문 :
1.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과 현대 추상회화의 서막〉, 김세리(인하대), 프랑스학회
2. 〈‘미지의 걸작’에 나타난 절대적 회화와 글쓰기 전략〉, 황혜영(서원대), 프랑스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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