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수상소감처럼

by 글섬

나는 쫄보다. 소심증 인생은 모든 걸 성격이 좌우한다.


어린 시절, 춤추고 노래하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건만 소심증에 압살 당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단체 무용을 배우다 눈에 띄어 교장의 추천으로 당시 해외 공연을 다닐 만큼 유명했던 어린이 무용단의 단장이 직접 찾아와 입단을 권유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소심증은 엄마 치마 뒤로 숨어 얼굴조차 들지 못하게 했다.(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눈에 띌 만큼 춤을 췄던 것이냐.)


좀 더 자라 중학교에서는 전국구 합창단의 부단장이셨던 음악 선생님이 오디션 프리패스 입단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 역시 엄마가 연회비의 압박에 아예 못 들은 척 하셨다는 이유로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못했다.


다 자라다못해 원숙한 서른의 나이에도 어김없이 소심증은 내 삶을 쥐락펴락했다. 함께 유학 중이던 동생이 반대하는 뉘앙스를 풍긴다는(정확히 언급한 게 아니라) 이유만으로, 내심 원했던 파리 음악 학교는 입밖으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파리 3대학원 입학 시험장으로 조신하게 들어설 만큼 남부럽지 않은 쫄보다.(내가 그 음악 학교를 원했었다는 걸 여태도 아무도 모른다.)


이 지경이면 가능한 게 별로 없다. 내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존재가 되어 그 어떤 자발적 도전도 피해서 산다.


대학 때 소규모 문학 잡지를 발간하는 친구의 권유로 짧은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후 지인들로부터 꾸준히 글쓰기에 대한 권유를 받아왔지만, 나 따위 글재주로는 어림없다 치부해버렸다. 무엇보다 나는 한없이 평범하고 다소 결핍된 나의 생을 사랑했기에 어쭙잖은 글로 인해 불쑥 세상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웠다.(아, 글로써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게 얼마나 요원한 일일진대 이 얼마나 가당찮은 두려움인가.)


요컨대 극내향적인 본성과 외향적인 잔재주가 충돌하는 불치의 이율배반적 인간형인 게다.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굴곡진 인생도 바로 이 이율배반적 성격 탓일 가능성이 크다.


오전 8시 47분,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라는 뜻 모를 문장이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그랬다. 이게 무슨 뜻일꼬, 그랬다.


그리하여 가만히 메일함을 닫은 뒤, 5일 동안 방치했다. 누가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브런치 작가에 지원했다고 여길 만한 품새다. 기존에 운영하고 있던 블로그에만도 오백여 편의 게시글이 엄연히 존재했지만 단 한 문장도 옮겨 심을 수 없었다. 그 5일 동안, 원래 하던 일에는 초집중력이 필요했다. 새삼스레 불면증이 도졌고 순간순간 계속해서 영혼이 탈출했다.


왜 이러나 싶어 나를 들여다보니 한동안 집 나갔던 소심증이 성실하게도 한껏 팽창해 있었다. 대상도 없이 겁이 났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가려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때리기뿐이었다.


알쓸인잡식 시작으로 물꼬를 터 봤다. 지금 나에게 브런치 작가란 무엇인가. 깜깜한 터널 속에서 어쩌면 곧 빛이 보일 수도 있다는 위로. 여기서 빛이란 무엇인가. 너덜너덜해져 하염없이 잠만 자고 싶은 나의 망막에 일렁이는 바로 그 호환, 마마보다 두려운 단어, 도전.


하지만 나는 위로를 선택한다. 길을 걷다가도, 운동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냅다 달려가 안아주고 싶은 내 안의 나를 향한 그저 위로.


혼자 사는 게 재밌어.

라고 딸아이가 말했을 때 나는 혼자 남겨진 어미로서의 설움이나 서운함 대신 의아했다. 재밌다는 게... 그게 뭐였더라...


5일 만에 작심하고 브런치를 열자, 재밌다. 재미를 넘어 설렌다. 아예 식음을 전폐할 기세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 이런 게 브런치 작가구나!


뭔가 있어 보이려 고릿적 이야기까지 소환한 듯 보이지만 실은 내 자신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빨리 달리기는 못하지만 오래 달리기는 자신 있다. 성실하게 오래오래 이곳에서 나의 광물 같은 생각의 빛을 가공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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