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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an 09. 2023

살아야 할 이유


     그런 건 없다.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니다. 존재의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내내 이유를 묻게 되는 건 삶이 팍팍해서다. 실은 삶에 진심이어서다.


     내 마음엔 아직도 집 앞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죽고 싶다고 생각하던 일곱 살 소녀가 있다. 그게 시작이었다. 한강을 건너 다녔던 고딩 시절엔 버스가 한강으로 추락했으면 좋겠다고, 방안의 온갖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지르거나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온몸을 향해 풀스윙을 날리는 어머니와의 동거 시절엔 어머니의 불행을 위해 창문으로 몸을 던져야겠다고, 백일도 안 된 딸아이가 새근새근 낮잠에 빠진 사이엔 베란다 창에 서서 훌쩍 뛰어넘으면 좋겠다고, 오죽하면 이름이 예술의 다리인 아름다운 파리 다리 위에서 센 강의 거친 물살을 굽어보면서도,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쭙잖은 자살 시도 후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남았다. 그렇기에 더욱 내게 살아야 할 이유는 간절했다. 왜, 왜, 도대체 왜, 왜 내가 살아야만 하는가.


     이유가 있어야만 살 수 있다면 굳이 살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유가 꼭 필요하다고 집요하게 묻는 그 마음은 생에 대한 열정이다. 진정 잘 살고 싶어서 이유를 알고 싶은 게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게 뭔지를 알아내는 게 보다 쉽지 않을까.


     꽃이 피고 지는 데 이유가 없듯이 나 역시 '있음' 그 자체로 충분하다. 사는 이유를 묻는 동안 아름다운 많은 시간들이 스쳐갔다. 내가 반드시 알아내야겠다고 마땅히 집념을 불태워야 했던 건 사는 이유가 아니라 사는 아름다움이다. 첫 돌 잔치를 마친 딸아이가 마치 일 년씩이나 기다리기 힘들었다는 듯 여의도 광장 한복판을 찬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저 혼자 뒤뚱뒤뚱 걸어다녔을 때, 슬픔 대신 아름다움을 느꼈어야 했다. 쟁쟁한 뮤지션들을 앞에 두고 마이크를 통해 내 목소리가 확성될 때, 두려움 대신 황홀함을 느꼈어야 했다. 남들은 평생 못 가볼 수도 있는 파리의 개선문과 오페라, 뽕네프를 통과해 걸어서 학교를 다녔을 때, 어떻게 하면 외국에서 시신이 발견되지 않게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대신 그 도시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좀 더 가슴에 품었어야 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이토록 오래 사는가. 반백 년을 살고 나니 이제야 조금 알 듯도 하다. 무려 오십 년이나 살아내야만 무슨무슨 이유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여기 있다. 오십 해를 살아낸 대가로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통장엔 딱 이번 달만 살 수 있을 만큼의 잔고뿐인데다, 하루가 멀다하고 인간적인 모욕을 당해도 어디 토로할 데도 없지만,


     나는 있다. 오늘 아침, 커피를 내려 신문을 펴고 앉은 거실 창으로 문득 햇살이 비춰들자, 아무런 이유 없이, 행복하다.., 싶었다. 사는 데 이유가 있다면, 혹은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려 살아낸다. 이 뜬금없이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나는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도 여기 있을 작정이다. 이 찰나의 순간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내가 존재한다는 진실 이전에 태초부터 존재해온 진실이다. 나는 살아남아서 세상의 아름다움의 일원이 되고 싶다. 내가 있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자 이유이다. 나에게는 나만의 아름다움이 있으므로,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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