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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an 11. 2023

엉덩이를 떠나

     번역은 엉덩이로 하는 일이다. 알고 보면 세상일 대부분이 엉덩이가 해내는 일이다. 어느 의대생도 말하지 않았던가. 의학은 엉덩이가 한다고.


     게다가 난 집착적이다. 딱 떨어지는 국어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절대로 엉덩이를 떼지 못한다. 기술번역이 밥벌이었던 시절에는 또 다른 이유로 엉덩이가 요구되었다. 일테면, 현대자동차 유럽 수출용 매뉴얼을 작업할 때는 시한이 생명이었다. 자동차를 수출하는 시점에 맞추어 프랑스어 매뉴얼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벤츠나 BMW 같은 수입 자동차 매뉴얼도 마찬가지다. 판매 시작 시점에 맞춰 매뉴얼의 번역, 편집, 출판 과정이 완결되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번역 의뢰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분 단위로 시간에 쫓긴다. 게다가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의뢰 받는 불상사가 벌어져도 거절할 수 없는 게 프리랜서의 비애다. 오전 6시부터 번역을 시작해서 점심 먹을 시간도 내기 어려워 컴퓨터 앞에서 밥을 떠 먹으면서 번역을 해대도 새벽 2시까지 엉덩이를 떼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엉덩이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죽 좋으련만, 그건 동화의 결말에서나 얻어지는 결과값이다. 현실은 무성한 변수의 향연이다. 오로지 엉덩이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번역의 결과값으로는 목 디스크라는 치명적인 값이 도출되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의 사용시간 증가로 흔하디 흔한 질병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정형외과 진료실 의자에 앉아, 연골이 닳아 없어져 사이좋게 붙어버린 낯선 나의 뼛조각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에는 태어나 처음 들은 병명이었다.


     모든 병이 그러하듯,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밥벌이는 숭고하기에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러자 통증으로 인한 불면의 밤들이 이어졌고, 결국 나는 백기투항했다.


     반백 년의 나이에 새로운 직업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내 딴에는 나름 경력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해 대형 영어학원의 도서관직에 지원했다. 놀랍게도 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원장은 내 이력서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 이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학원에서 오십대 여자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셔틀 버스 안전 도우미. 초등학교 4학년 미만의 어린 학원생들이 셔틀 버스에 안전하게 오르내리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내 나이쯤이면 그냥 하던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건 밑바닥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왜 몰랐지? 한참동안 19세기 영불문학에 파묻혀 사느라 21세기 현실은 과감히도 떠나 있었나 보다. 무용한 나의 이력과, 그보다 훨씬 더 무용해 용감무쌍하게까지 여겨지는 나의 연식에 대한 뒤늦은 자각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그래서 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셔틀 버스에 올랐다. 일단 하자. 번역만 아니라면 뭐든 시작해야 할 때라고, 요컨대 지금은 엉덩이를 떠나야 할 때라고, 내 안의 내가 강력하게 주창했다. 나는 그를 존중한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내 삶의 이정표다.


     나는 오십대이고, 이제야 비로소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아름답다. 나이 들어 푸석푸석한 얼굴 이면에 무궁한 세계를 품은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세상은 더 이상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 음, 뭐, 괜찮다. 따지고 보면 뭐 또 언제는 호의적이었더냐. 세상의 호의가 사라졌다면 나 스스로라도 내게 호의를 베풀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읽기와 피아노, 이제는 살기 위해 필수 항목이 된 운동에 필요한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만 셔틀을 타기로 결정했다. (다소 과도한 호의는 아니었는지 지금은 되묻곤 하지만)


     요컨대 수입의 안정화는 이뤘지만 경제적 궁핍은 면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음.. 뭐, 괜찮다. 뭐 또 언제는 면한 적 있더냐. 일단은 엉덩이로 하는 일만 아니면 다 괜찮다. 원래가 산다는 건 더하고 빼고 곱해봐야 제로섬 게임이고, 무엇보다 아직 생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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