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인숙

철학적 연구 - 제15권

by 글섬

작품 배경


〈붉은 여인숙(L’Auberge rouge)〉은 1831년에 《파리 저널(Revue de Paris)》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단행본으로는 같은 해에 《고슬랭(Gosselin)》 출판사에서 〈새로운 철학 이야기(Nouveaux contes philosophiques)〉 시리즈로 발간되었고, 나중에 『인간희극』의 「철학적 연구」로 분류되었다.


이 소설의 소재는 19세기 전반기 동안 온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영구 미제 사건인 ‘붉은 여인숙’ 사건이다. 1831년 10월 26일 한 부농의 부어오른 시신이 강가의 어느 절벽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번창하는 여인숙을 경영하다가 얼마 전에 그만둔 부부와 그들의 하인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어느 부랑자가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는 바람에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아 1833년 10월 2일 범죄 현장인 여인숙 앞에서 구경꾼이 3만 명이나 몰려든 가운데 참수 당했다. 그들은 투숙객의 돈을 뺏기 위해 오십여 차례의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지닌다. 하나는 독일인 헤르만(Hermann)이 들려준 이야기를 화자가 정리한 이야기로, 살인자가 참석한 만찬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공포가 배가되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화자와 빅토린(Victorine)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정의의 드라마이다. 전자는 ‘진짜 무서운 독일 이야기’로 호프만의 환상소설을 넌지시 암시한다. 후자는 특히 화자의 갈등에 비추어,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에 등장하는 라스티냑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발자크 소설세계의 문턱, 즉 『인간희극』의 출발점을 구상한다.


이 소설에 대한 철학자 알랭의 연구와 안 마리 메이닝거(Anne-Marie Meininger)의 분석에 따르면, “〈붉은 여인숙〉은 살인, 잘못된 흔적, 잘못된 판결과 살해범 지목 오류 등으로 인해 일견 범죄수사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발자크가 1831년에 집필을 시작했을 때부터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매우 ‘철학적인’ 소설로, 『인간희극』의 「철학적 연구」로 분류하기에 손색없는 작품이다.”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과 같은 해에 발표된 이 소설은 발자크의 문학 이력에 결정적인 전환점으로서, 이 작품을 통해 발자크는 모든 장르를 승화시키는 필력과 가공의 인물을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는 필력을 갖춘, 위대한 작가로서의 진정한 아우라를 갖추게 된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발자크는 조르주 상드(George Sand), 샤를 필리퐁(Charles Philipon) 등과 같은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오르는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더불어, 편협한 문인들의 질투심도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니, 이들은 상상을 초월한 비열한 짓으로 발자크를 ‘가짜 귀족’이라고 조롱했다. 샤를 라부(Charles Rabou)는, 강력한 비평가였던 쥘 자냉(Jules Janin)이 “발자크는 《데바(Débats)》 지에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고, 우리는 진정으로 그 점을 혐오하는 바이다. 이것은 일종의 폭동이다. 좋다. 그렇다면 계급을 몰아세울 필요가 있다.”라는 비평으로 갑작스럽게 급상승해가는 발자크의 명성을 저지하려는 그의 의도에 대해 경고했다. 실제로 이런 악의적인 비평은 발자크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 성공가도를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발자크는 〈올빼미당원(Les Chouans)〉에서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는 ‘de’를 빼먹고 ‘Honoré Balzac’로 서명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철학적인 작품에만 ‘de’를 추가하는 바람에 무성한 소문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여인숙〉은 완전히 혁신적인 작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의 질문들은 제시됨과 동시에 모면되고, 이 작품의 사회는 사회의 모든 ‘영향력’ 속에 건재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의 원인들은 바로 「철학적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독일과 매우 폭넓게 교역을 하는 파리의 한 은행가가 어느 날, 뉘른베르크(Nuremberg)의 꽤 영향력 있는 어느 회사의 사장인 독일인 친구 헤르만(Hermann)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주인은 손님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절친한 자본가와 상인 친구 몇 명, 그리고 상냥하고 예쁜 여자들도 함께 초대했다. 그렇게 함께 모여 샴페인을 곁들인 성대한 저녁식사를 마친 뒤, 은행가의 딸이 헤르만에게 “진짜 무서운 독일 이야기 하나”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이 순간에 화자인 ‘나’는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낯선 남자를 주시했다. 매우 평범한 얼굴의 그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그 낯선 남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파산한 사람 같다고 말했다. 여자는 그 남자가 제국 군대의 옛 납품업자로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이니 파산할 리 없다고 귀띔해주었다. 남자의 이름은 장 프레데릭 타이유페르(Jean-Frédéric Taillefer)였다. 이윽고 헤르만은 코담배를 한줌 들이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1799년 10월 21일 해질녘에 두 명의 젊은 군의관이 라인(Rhin) 강 왼편에 위치한 안더나흐(Andernach) 부근에 도착했다. 온순하고 친절한 과학도인 이 프랑스 젊은이들은 ‘초급 군의관’ 위임장을 들고 소속 연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둘 다 보베(Beauvais) 출신인 이들은 라인 강 연안의 시적 정취에 빠져들었다.


헤르만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의 이름만 기억했는데, 프로스페르 마냥(Prosper Magnan)이었다. 헤르만이 프로스페르 마냥이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납품업자는 유리잔을 든 손을 가볍게 떨고 이마가 땀으로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두 젊은이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이슥했다. 그래서 그들은 상관을 찾아가 부임신고를 하고 숙소를 지정받노라면 많은 시간을 허비할 것으로 판단해 그날 밤은 안더나흐 인근에 위치한 한 여인숙에서 보내기로 했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이 여인숙은 강물의 잿빛 색조와 대조되어 짜릿한 인상을 주었다. 붉은 여인숙의 주인은 방이 다 나갔다며 두 청년에게 주인의 침실을 내주었다. 두 청년이 여인숙의 공동거실로 들어가 여인숙 여주인이 내준 생선 요리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있을 때, 밖에서 배가 선창에 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 한 명이 무거운 가방 하나를 들고 여인숙으로 들어왔다. 발헨퍼(Walhenfer)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제법 규모가 큰 장식 핀 공장을 소유한 제조업자였다. 그는 여인숙이 꽉 차서 공동거실의 의자에서 자야할 처지였다. 게다가 방금 전에 두 청년에게 내준 생선 요리를 마지막으로 식사 재료도 떨어져 허기를 달랠 길이 없었다. 프로스페르는 발헨퍼에게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의했고, 세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여인숙 주인이 오래 묵은 포도주 다섯 병을 내주었고, 덕분에 세 사람은 포도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붉은 여인숙의 공동거실에는 출구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라인 강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 있는 안더나흐 길 쪽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이 앞으로는 작은 선창이 있고, 발헨퍼의 배가 바로 이 선창에 정박해 있었다. 다른 출구는 여인숙 안마당으로 통해 있었다. 공동거실의 창문은 빗장들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고 암나사를 조이는 방식이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두 청년은 자연스럽게 침대 하나를 발헨퍼에게 양보하고 둘은 한 침대에서 자기로 했다. 발헨퍼는 두 청년의 친절에 감사하며, 사실 자신의 가방에 10만 프랑 상당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어서 밖에서 자기엔 조심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웠고, 발헨퍼는 이내 잠이 들었다.


프로스페르 마냥은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깨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서서히 사악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잠든 발헨퍼의 10만 프랑을 집중적으로 생각했다. 처음엔 10만 프랑을 쓰는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0만 프랑이면 어머니가 그토록 소원하시는 초원을 사들이고, 재산이 없어 감히 넘볼 수조차 없던 아가씨와 결혼도 할 수 있고, 급기야 시장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자 갑자기 상상을 현실로 만들 궁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했다. 자신의 외과 도구를 이용해 발헨퍼의 목을 잘라 라인 강에 던져버리고 그의 가방을 들고 유리창을 통해 달아나 뱃사람들을 매수해 배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타이유페르가 이마의 땀을 닦고는 물을 마셨다.


프로스페르는 천천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일어났다. 그는 공동거실로 나가 창문의 쇠막대 나사를 풀어 쇠막대를 구멍에서 조용히 빼냈다. 겉창을 열자 파리한 달빛이 거실을 비추며 발헨퍼가 잠들어 있는 방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순간, 프로스페르는 멈칫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서 의료기 상자를 꺼내 적합한 도구를 찾았다. 그가 온 힘을 모아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며 언뜻 빛을 본 듯했다. 그는 침대 위로 도구를 내던지고 밖으로 나가 창가에 섰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공포가 밀려 왔고, 그는 자신이 또 다시 추악한 유혹에 굴복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창문을 통해 길 쪽으로 급히 뛰어 내려가 라인 강을 따라 걸었다. 아름다운 별들이 쏟아지는 강변을 지치도록 걷고 있자니 점차 건전하고 도덕적인 생각으로 이끌려 마침내 추악한 공상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행복하고 기뻤다. 그는 신에게 감사한 뒤 여인숙으로 돌아와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잔뜩 지쳐버린 뒤라 눕는 즉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프로스페르는 몹시 소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이윽고 프로스페르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자신의 매트리스와 발헨퍼의 침대 사이에서 흥건히 고인 피의 늪이 보였다. 발헨퍼의 머리는 완전히 절단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몸통은 그대로 침대에 놓여 있었다. 프로스페르는 자신의 침대 시트와 두 손을 물들인 피를 보았고, 침대 위에 여전히 놓여 있던 자신의 외과 도구를 그제야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그만 의식을 잃고 발헨퍼의 피가 흥건한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프로스페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공동거실에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를 프랑스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스페르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내가 했던 생각에 대한 벌이었다”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타이유페르가 기침을 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이마를 닦았다. 헤르만의 이야기에 집중한 다른 손님들은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지만 나만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프로스페르는 연행되었다. 여인숙에서 감옥으로 가는 동안 군중과 병사들이 그에게 퍼붓는 욕설과 온갖 사람들이 토론하는 떠들썩한 목소리, 라인 강의 물소리, 맑고 신선한 공기의 안더나흐 풍경 등이 온통 희미하고 흐릿하게 감지되며 그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 헤르만은 투옥되어 있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안더나흐 인근에서 조직한 의용군 중대를 지휘하다 한밤중에 프랑스 부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된 상태였다. 헤르만의 아버지가 헤르만의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그래서 헤르만은 프로스페르 마냥이 안더나흐의 감옥에 수감될 때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창백하고 초췌했으며 온통 피범벅이었는데도 얼굴 표정은 천진하고 순수하기만 해서 헤르만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프로스페르는 독방에 갇히고부터 말이 없었다.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그는 스물네 시간 뒤에 총살될 예정이었다.


헤르만은 저녁에 감옥의 안마당에서 산책하는 자유 시간 동안 프로스페르의 독방 창문 아래로 가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헤르만에게 기탄없이 털어놓았는데, “그는 자신이 결백하며 동시에 유죄라고 생각했다.” 헤르만이 프로스페르의 동료 군의관을 진범으로 의심하자 프로스페르는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다. 헤르만이 그럼 그 군의관이 어째서 현장에 없었던 거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프로스페르는 아마도 잠에서 깨어 겁에 질려 정신없이 달아나버렸을 거라고 대변해주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발헨퍼의 가방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야 했다. 그러자 갑자기 프로스페르는 울음을 터뜨리며 살인하지 않았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발헨퍼의 머리를 자르려고 팔을 들어 올렸고, 때문에 그는 비록 생각일 뿐이었지만 유죄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아들이 살인자로 수감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살인 여부를 떠나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실 게 자명했다.


헤르만은 프로스페르에게 결백하니 무죄판결을 받을 거라고 격려했다. 다음 날, 프로스페르는 군법회의에 출두했다. 그다음다음날 사단이 이동하게 되어 연대장은 범죄가 저질러진 현장에서 재판을 마치고 안더나흐를 떠나고 싶어 했다. 정오 무렵에 프로스페르가 군법회의를 마치고 다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인숙 주인과 뱃사람들의 증언들이 모두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날 밤, 한참동안 강변을 이리저리로 걸었던 그를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가 금과 다이아몬드를 파묻으러 쏘다녔다고 진술했다. 모두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나갔다고 진술했는데, 여인숙의 모든 창문과 출입문은 아침까지 닫혀 있었기에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전혀 없었다. 10만 프랑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던 가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와 또 다른 군의관이 둘 다 똑같이 살인범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내일 총살이 집행될 것이었다.


바로 이때, 헤르만은 갑자기 나머지 군의관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프레데릭이었다. 헤르만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을 외쳤을 때, 타이유페르의 눈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프레데릭은 프로스페르와 다섯 살 때부터 중학교, 대학교까지 계속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였다. 프로스페르는 프레데릭의 우정을 의심함으로써 두 번 죽는 심정이었다. 프로스페르는 급박한 심정으로 헤르만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달라고 애원했다. 어머니를 만나 자신이 결백했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울며 애원했다. 그는 마지막 밤을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보냈다.


헤르만은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가자 프로스페르의 편지를 들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이미 사망한 뒤였다. 헤르만은 참담한 심정으로 프로스페르의 편지를 태웠다.


바로 이때, 내가 헤르만에게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이 살롱에 있는 한 사람을 당신 앞에 세워 놓고 ‘이 사람이 살인자다!’라고 외친다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타이유페르를 지목하며 독일로 종군했던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 타이유페르는 독일에 가본 적도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은행가가 끼어들어 그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독일 바그람 대대에 식량을 납품하지 않았냐고 응수했다. 타이유페르는 심하게 당황하며 이제야 생각난 듯이 그랬었다고 수긍했다.


타이유페르와 나 사이에 야릇한 투쟁이 성립되었고, 그는 내내 내 눈길을 피했다. 나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예리한 시선으로 계속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곧바로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결국 나의 고문에 지친 타이유페르는 서둘러 카드놀이를 시작했고, 나는 적당한 틈을 타서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타이유페르에게 혹시 보베 출신이냐고 물었다. 타이유페르는 그렇다고 답한 뒤 카드를 내려놓았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느닷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는, “왜 인간의 정의와 신의 정의에 맡기지 않는 것이냐”고 추궁하며 내가 거의 사형집행인처럼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이때, 살롱으로 한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사흘 전에 어느 무도회에서 보고 내가 열렬히 반해버린 바로 그 여자였다. 나는 옆자리의 여자에게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빅토린 타이유페르(Victorine Taillefer) 양으로, 바로 타이유페르의 딸이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더욱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은행가가 살롱으로 들어오더니 빅토린에게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러자 곧바로 빅토린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카드 게임이 중단되고, 사람들은 타이유페르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은행가의 아내는 사실 그가 지병이 있었다고 말했다. 신경질환의 일환으로 원인 모를 발작을 일으켰는데 격심한 통증이 동반되었기에 타이유페르는 발작에서 회복될 때마다 다시 그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거열형을 받는 게 나을 거라고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 병을 군대에서 얻어 거의 삼십 년 동안 시달렸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배 안으로 떨어질 때 목재 파편이 머릿속에 박힌 뒤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잠시 후, 빅토린이 울면서 들어왔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나가 그녀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미 마차에 올라 있던 타이유페르가 나를 언뜻 보더니 얼굴이 심하게 떨리고 발작적인 고함소리를 내더니 나에게 소름끼치는 눈길을 던졌다.


나는 고뇌에 빠졌다. 살인자와 인척관계를 맺는다는 건 명예에 어긋나는 처사이지만 아무래도 빅토린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성적인 고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살롱을 찾아 다녔고, 그녀와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에 엄청난 즐거움을 느꼈다. 빅토린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교양 있고 재능과 매력이 가득하면서도 자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여자였다. “나의 사랑은 정당한 것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회한으로 가득한 만큼, 범죄적인 정념의 색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아버지의 착하고 온화하며 우아한 품성을 자랑했다. 어느 날에는 그녀의 아버지와도 부딪혔고, 나는 그만 그에게 인사하고야 말았다. “나는 나 자신도 타이유페르 집안에 풍요를 가져다준 범죄의 공범이나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나는 결국 그녀를 등지기 위해 독일 안더나흐로 달아났다. 하지만 돌아왔고, 다시 만난 빅토린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러자 나는 다시 격렬한 정념의 불꽃에 휩싸였다. 결국 나는 내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이 고상한 도덕과 철학의 문제를 순수한 양심을 가진 친구들을 통해 밝혀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나의 문제를 그대로 이야기했고, 좋은 견해를 말해달라고 청했다. 친구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누군가 “미덕처럼 범죄도 등급이 있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또 누군가는 이 문제는 양심의 문제일 뿐, 법정의 문제는 아니기에 문제될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그녀와 결혼하되, 그녀 아버지의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라고 충고했다. 나의 옛 후견인은 “토론 그 자체로 판결”이며 “인간이 토의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는 법”이라고 외쳤다. 손님들은 결국 나의 결혼 여부를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다. 개표 결과, 반반이 나왔다.


나는 사실 두 달 전에 타이유페르의 사망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다. 프로스페르 마냥은 상속자를 남기지 않았고, 발헨퍼의 가족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손님들을 향해, 과연 누구에게 타이유페르의 재산을 반환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빅토린에게 그녀의 모든 재산이 피로 얼룩진 것이었다고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굳이 그녀의 아버지를 두 번 죽일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구빈원이라도 세워야 할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구빈원들은 대부분이 악덕의 보호소”가 된 것만 같으니, “허영심이나 길러주기에 적합한 그런 곳에 기부한들 과연 속죄가 될 수 있을까?” 게다가, 만일 내가 우아함과 예술을 향유하는 풍요로운 삶에 익숙한 빅토린에게 아무런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그녀의 재산을 포기하라고 권유한다면 그녀의 마음을 잃어버릴 게 뻔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까지 아무 말고 하지 않고 있던 어떤 신사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멍청한 녀석, 그러게 왜 그에게 보베 출신이냐고 물었어!”




분석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구조로 갖는 이 작품은 발자크가 환상소설에서 리얼리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즉 프로스페르 마냥으로 표상되는 독일 낭만주의적 발상에 머무르지 않고 이 단편의 화자인 ‘나’를 거쳐 이 단편 이후의 라스티냑, 뤼시앙 샤르동, 보트랭 등의 인물들에게로, 달리 말하자면 소설의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발자크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다.


생각의 마력은 긍정적인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지거나 누군가에게서 저주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때도 있는데, 이럴 때면 섬뜩한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대개의 생각들은 뜬구름이나 바람처럼 흩어져 사라지지만, 어떤 생각들은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 어떤 끈으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발자크의 매력 중 하나는 그가 바로 이러한 끈에 줄기찬 관심을 갖고 ‘사유의 파괴적인 힘’을 분신의 형상에 의거하여 소설화한 데 있다.



▶ 참고 문헌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발자크 외, 이규현 역, 창비

▶ 작품 배경 / 줄거리 / 분석 모두 상기 참고 문헌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 및 인용한 것입니다.

▶ 볼드 처리된 문장은 역자가 원작을 번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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