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에서

1876년 / 노영란 옮김

by 글섬

작품 배경


〈물 위에서(Sur l’eau)〉는 1876년에 발표된 모파상의 환상 소설로, 1876년 3월 10일 《프랑스 통신(Le Bulletin français)》에 기 드 발몽(Guy de Valmont)이라는 가명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최초의 제목은 〈보트에서(En canot)〉였는데, 단편집 〈텔리에 집(La Maison Tellier)〉에 수록될 때 〈물 위에서〉로 변경되었다.




작년 여름, 나는 파리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센 강가에 있는 작은 시골 별장 한 채를 빌려 매일 저녁 그곳에 가서 잠을 잤다. 며칠 후 이웃에 사는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삼십 대 혹은 사십 대 정도의 남자로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노련하고 열정적인 뱃사공이기도 했던 그는 언제나 물 가까이, 항상 물 위에서 지내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분명 태어날 때도 배 안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노를 젓다가 죽을 게 분명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그와 함께 센 강변을 산책하다가, 배를 타면서 겪었던 일화들을 좀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곧 생기를 띠면서 달변이 되어 강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부에게 강이란 신비하고, 심오하고, 미지의 그 어떤, 신기루와 환상의 세계입니다. 묘지에 밤이 내리면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처럼, 사실 강은 세상에서 가장 음산한 묘지, 무덤 없는 묘지랍니다. 바다는 소리 지르고, 울부짖지만 충성스러운 반면에, 강은 소리 없이 흐르며 조용하지만 언제 배신할지 모른답니다. 저로선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이 대서양의 높은 파도보다 더 무섭습니다. 하지만, 강물이 떠오르는 태양 아래서 반짝일 때, 그리고 물결치는 갈대로 덮인 강둑 사이에서 조용히 찰랑일 때 강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십년 전쯤 저는 이곳 강변에서 아주 특이한 일을 겪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저는 매우 피곤한 상태로 제가 밤에 항상 사용하는 커다란 배를 타고 힘들게 노를 저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죠. 갈대밭이 튀어나온 곳에서 한숨 돌리려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아주 멋진 밤이었어요. 달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강물은 반짝이고 공기는 부드럽고 평온했습니다. 그 고요함에 유혹된 저는 파이프 한 대를 피우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닻을 강물 속에 던졌습니다. 물의 흐름에 따라 내려가던 배는 닻줄이 끝까지 풀려 멈추자 비로소 멈추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강은 완벽하게 고요했어요. 저는 저를 둘러싼 그 놀라운 고요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갑자기 개구리가 울었는데, 그 소리에 제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저는 기분전환을 위해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골초로 소문난 제가 두 번째 모금부터 속이 울렁거려서 담배를 꺼버렸습니다.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대보기도 했지만 제 목소리가 듣기 괴롭더군요. 그래서 배 한가운데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조용히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때 배가 가볍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불안해졌습니다. 뭔가 묵직한 어떤 힘이 배를 천천히 끌어당기는 것 같았죠. 그래서 저는 닻줄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런데 닻이 올라오질 않았어요. 더 세게 잡아당겼지만 뭔가에 걸린 듯 닻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불안해진 저는 노를 저어 배의 방향을 돌린 뒤에 다시 한 번 닻줄을 사납게 마구 흔들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낙담한 채 풀썩 주저앉아 어찌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닻줄은 제 팔뚝보다 더 굵은 나무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닻줄을 끊거나 배에서 분리한다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지나가던 낚시꾼이 저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좀 진정되더군요. 그제야 파이프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럼주도 두세 잔 마셨고요. 제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더군요. 날씨가 이렇게 푸근하니 부득이한 경우엔 그대로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도 무리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배의 가장자리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놀라서 움찔했고, 식은땀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리며 오싹했어요. 뭔가가 물에 떠내려 온 것 같은 소리였죠. 저는 다시 닻줄을 잡고 필사적으로 잡아당겨 보았습니다. 하지만 닻은 요지부동이었고, 저는 지쳐서 주저앉았습니다.


강물 위로는 차츰 매우 두터운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안개가 짙어지자 더 이상 강물도 제 발도 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단지 저 멀리로 달빛 아래 창백하게 빛나는 갈대만 보이더군요. 그러자 저는 흰색 솜 덩어리 속에 허리까지 파묻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 주위에 이상한 존재들이 가득 들어차 헤엄을 치는 것 같은 상상에 저는 극도로 불안해졌고 두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헤엄을 쳐서 도망칠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는 강기슭도 보이지 않아 갈대 속에서 길을 잃고 배로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시커먼 강물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제가 보이는 것 같았죠.


두려워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고 굳은 의지를 다졌지만 마음 속 공포는 속수무책으로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럼주를 들이키고는 혼신의 노력으로 사방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버렸을 즈음에야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럼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배 밑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두 시간쯤 잠도 자지 못하고 눈을 뜬 채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감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어요. 마치 제가 내는 아주 작은 소리에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끔찍하게 두려웠습니다. 그러다 극도로 조심하며 겨우 몸을 일으켜 배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거기엔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장 근사하고 가장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요. 눈이 부시더군요. 환상적인 광경이었습니다. 강물 위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조금씩 물러가 강기슭에 모여 있었죠. 달빛을 받아 눈처럼 찬란한 광채를 내며 눈부시게 반짝이면서 말이죠. 제 머리 위에서는 커다란 보름달이 우윳빛 하늘 한가운데서 빛을 발했고요. 물속 개구리들과 두꺼비도 모두 깨어나 단조롭고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더 이상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너무도 특별하고 너무도 기이한 풍경의 강렬한 분위기에 놀라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지경이었던 거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깜빡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보니, 달은 이울고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더군요. 강물은 음산하게 출렁거렸고,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날은 춥고 어둠은 아주 깊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바싹 갖다 대봐도 제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죠.


하지만 이내 어둠이 차츰 엷어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제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게 느껴져,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어떤 어부였어요. 그의 배가 다가왔고, 저는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어부는 자신의 배를 제 뱃전에 바짝 붙여 저와 함께 닻줄을 잡아당겼습니다. 닻은 움직이지 않았지요. 그러는 사이, 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날은 차가워졌습니다. 슬픔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그런 날씨였지요. 또 다른 배 한 척이 보였고, 우리는 그 배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 배도 다가와 우리와 함께 닻줄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닻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상당한 무게가 실린 채 닻은 천천히, 천천히 올라왔습니다. 마침내 닻줄 끝에 시커먼 물체가 보였고, 우리는 그것을 배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돌덩이를 목에 매단 노파의 시신이었습니다.



▶ 참고 문헌 : 〈모파상 환상 단편집〉, 모파상 저, 노영란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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