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저녁에

1881년 / 글섬 옮김

by 글섬

작품 배경


〈어느 봄날 저녁에(Par un soir de printemps)〉는 1881년 5월 7일자 《르 골루아(Le Gaulois)》 지에 처음 발표된 소설로, 1899년에 《올렌도르프(Ollendorff)》에서 출간된 모파상 사후 단편집 〈밀롱 영감(Le Père Milon)〉에 수록되었다.




잔(Jeanne)은 그녀의 사촌 자크(Jacques)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기에 그들에게 있어 사랑은 격식을 차리거나 정중한 형태를 띠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함께 자라났다. 애교스러운 잔은 자크에게 순수한 애교를 부렸다. 그녀는 자크가 친절한데다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온 마음으로 그와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손끝부터 발끝까지 살이 떨리는 것 같은 전율은 없었다.


자크로 말하자면, 그는 그저 그녀가 귀엽고 예쁜 사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자가 예쁜 여자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본능적인 감동으로 그녀를 생각했고,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은 우연히 그녀의 어머니가 고모 알베르트(Alberte)에게 이제 곧 애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잔은 곧장 자크를 열렬히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면 얼굴을 붉혔고, 그의 손을 잡으면 손이 떨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시선을 떨어뜨렸고, 그의 품에 안기기 위해 갖은 애교를 떨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자크가 진정한 애정만큼이나 만족스런 허영심으로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귀에다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오래전부터 친밀했던 두 사람이기에 어색함이나 당혹감 없이, 이 날부터는 온통 달콤한 속삭임뿐이었다. 거실에서 자크는 그의 어머니와 잔의 어머니, 그의 고모 리종(Lison)이 보는 앞에서 잔에게 키스했다. 그는 온종일 그녀와 단둘이 풀과 들꽃으로 가득한 초원을 가로질러 시냇가를 따라 숲속을 산책했다. 열렬한 조바심 같은 건 없었지만, 감미로운 애정 표현 속에서 손가락 깍지를 끼고, 열정적인 시선을 오랫동안 교차했다. 서로를 부르는 그들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처럼, 서로의 동정을 살피고, 서로 기다리고, 서로 기대하며 아무리 한껏 서로를 품에 안아도 여전히 막연한 욕망으로 그들은 막연히 고통 받았다.


이따금 두 사람은 온종일 일종의 열렬한 온기 속에서, 플라토닉한 애정 속에서 보냈고, 저녁이면 묘한 근육통 같은 걸 느꼈다. 그러면 두 사람 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기대와 기다림으로 팽만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어머니와 리종 고모는 이 젊은 사랑을 애정 어린 미소로 바라보았다. 특히 리종 고모는 그들을 지켜보는 게 무척이나 감동적인 듯했다. 나이가 많은 리종 고모는 말수가 적고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식사 시간에만 잠시 나타났다가 식사를 마치면 곧장 방으로 올라가 줄곧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편안하고 느긋한 분위기와 부드럽고 슬픈 눈의 그녀는 이미 거의 가족에 속해 있지 않았다.


둘 다 미망인인 두 어머니는 리종 고모를 다소 무의미한 존재로 여겼다. 그들은 그녀를 리즈(Lise)라고 부르며 친밀하게 대했었다. 미혼인 그녀가 앞으로도 결코 결혼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 리즈에서 리종으로 바꿔 불렀다. 그리하여 ‘리종 고모’가 된 그녀를, 겸손하고 깔끔한 성품에 무척이나 소심한 그녀를 이제는 호의적인 무관심과 연민과 습관이 뒤섞인 애정으로 사랑했다.


아이들은 절대로 리종 고모의 방에 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에는 오로지 하녀만 들락거렸다. 가족들은 리종 고모에게 할 얘기가 있으면 하녀를 올려 보냈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의 가련한 생이 고독하게 흘렀다. 그녀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아도 가족들은 그녀에 대해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족들 가까이에 있어도 여전히 미지의 존재였다. 가족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 속에도, 그들의 습관 속에도, 그들의 존재 속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마치 집안의 물건들과 소리 없이 소통하는 듯, 그녀의 손이 닿으면 모두 솜이 되어 버리는 듯, 그녀는 모든 것을 섬세하게 만졌다.


가족들이 ‘리종 고모’라고 부를 때 ‘리종 고모’라는 말에는 ‘설탕 그릇’이나 ‘커피포트’라고 말할 때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리종 고모보다는 애완견 루트(Loute)가 훨씬 더 존재감이 뚜렷했다. 루트는 끝없이 귀여워해주고 연신 사랑스럽게 불러주니 말이다.


두 사촌의 결혼은 5월말로 예정되었다. 새싹과 꽃으로 가득한 봄날에 잔과 자크는 감미로운 행복에 압도된 채 숲을 거닐었다. 그러나 봄 숲의 술렁거림과 함께 마음속에 새롭게 이는 전율로 인해 평소보다 소심해진 연인은 온종일 성문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멍한 시선으로 공연히 연못의 백조들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저녁이 되자 열기가 다소 진정된 그들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거실의 열린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전등 불빛 속에서 카드놀이를 했고, 리종 고모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양말을 떴다.


저 멀리 연못 뒤, 커다란 나무들의 잎사귀들 사이로 달이 문득 나타났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조금씩 하늘로 떠오른 달은 꿈들이 떠다니는 이 세상의 시인들과 연인들에게 달빛을 쏟아주기 시작했다.


젊은 두 남녀는 달이 떠오르는 걸 바라보다가, 밤의 감미로운 온기에 젖어들어 잔디 위로 쏟아지는 달빛에 취해 느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하얀 잔디 위를 걸어 달빛으로 반짝이는 연못을 향해 걸어갔다. 두 어머니는 카드놀이를 마치자 졸음이 몰려와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한 어머니가 애들을 불러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어머니가 두 남녀가 감미롭게 방황하고 있을 창백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버려두자고, 밤이 너무 아름답지 않느냐고, 리종 고모가 그들 대신 애들을 기다려 주실 거라고 말했다. 늙은 고모는 작은 목소리로 당연히 기다려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두 자매는 침대로 향했다.


그러자 리종 고모도 뜨고 있던 양말을 안락의자에 놓아두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매력적인 봄밤을 바라보았다. 두 연인은 끝도 없이 걸어갔다. 그들은 깍지를 낀 채 잔디를 가로질러 땅에서 발산되는 보이지 않는 시정에 취해 아무 말 없이 연못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잔이 등불로 인해 창틀에 그려진 늙은 고모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녀가 자크에게 리종 고모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자크도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 고모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꿈을 꾸며 느리게 걸어갔다. 그러나 잔디밭이 이슬에 덮여 약간 차갑게 느껴졌기에 잔은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왔다.


그들이 거실로 돌아왔을 때 리종 고모는 다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뜨개질감에 잔뜩 고개를 숙인 채 마른 손가락을 약간 떨고 있었다. 잔이 고모에게 다가가 이제 자러 가자고 말하자 늙은 고모가 눈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빨개져 있었다. 울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자크와 잔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대신에 자크는 잔의 신발이 온통 물에 젖어 있는 걸 알아채고는 걱정스런 목소리,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이 작고 사랑스런 발이 춥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고모의 손이 심하게 떨리더니 뜨개질감을 놓쳤다. 털실 뭉치가 거실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고모는 갑자기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두 조카는 고모를 향해 달려갔다. 잔이 무릎을 꿇고 팔을 벌려 고모를 끌어안으며 무슨 일이냐고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늙은 고모는 서글픔으로 몸을 떨면서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자크가 네게 작고 사랑스런 발이 춥지 않느냐고 묻는 말을 들으니, 이제 내겐 아무도, 그 누구도 그런 걸 물어봐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이젠 절대로!.. 절대로 내겐!”




▶ 〈Par un soir de printemps〉 원문 번역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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