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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보다 근자감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자기만의 방

by 글섬

어느 성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자신감이란 무엇이길래 그리 뻑하면 온데간데없어지는지 생각하다가 사전을 찾아봤다.


자신감 : 자신이 있다는 느낌.

자신 :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거나 어떤 일이 꼭 그렇게 되리라는 데 대하여 스스로 굳게 믿음. 또는 그런 믿음.


사전적 의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혹시 자꾸만 실종되는 게 자신감이 아니라 그보다는 먼저, "어떤 일"이라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해낼 수 있다거나 꼭 그렇게 되리라는' 그 "어떤 일" 말이다. "어떤 일"이 먼저 존재해야만 그에 대해 해낼 수 있다거나 꼭 그렇게 되리라는 굳은 믿음도 생길 터인데 말이지.


그런데 말이다, 자신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뭐 얼마나 되겠는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어떤 일을 해낸 경험이 있어야만, 그것도 여러 차례 있어야만 어렵사리 얻게 되는 믿음이니 삶은 대개 자신감보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아닐까.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심했다. 현명하게도 아이 아빠가 친정 엄마에게 SOS를 청하여 일주일에 이틀씩 아이를 맡겨두고 가까운 지인과 함께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어느 날, 수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 그 순간의 기억이 수십 번 반복해서 본 영화처럼 생생하다.)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고 끊고 다시 걸고 끊고를 반복하던 지인이 문득 떠오른 듯이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네가 있었네, 라고 말했다. 나는 멀뚱댔는데, 갑자기 지인은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다. 딱 한 번이면 된다고. 응? 내가? 내가 널 도와? 그럴 리가.


지인은 당시 시판되는 음반 대부분에 이름이 박히던 코러스계의 대모였다. 오전에만 한가할 뿐, 그녀의 다이어리는 오후 1시경부터 새벽 3시 가까이 일정으로 빼곡했다. 너무 바빠서 밤새 번 돈을 들고 은행에 갈 시간도 없어 아침이면 방바닥에 뿌려둔 채 다시 하루로 빨려들어가곤 했다. 주요 음악 방송은 주로 일주일 전 즈음에 연습 일정이 있다.(순위 프로그램은 예외이다. 그건 그냥 평소 실력으로 한다.) 당시 주요 음악 방송이라 함은 <수요예술무대>였고, 이 프로그램은 진행을 맡았던 김광민 씨 덕분에 클래식 연주자들도 출연하는, 그야말로 고품격 음악 방송이었으니 녹화 전 연습이 더욱 중요했다. 바로 그 프로그램 코러스 멤버에 구멍이 났던 거였다. 연습은 바로 내일이었다. 급하게 실용음악과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전화를 돌려대던 지인은 가수가 워낙 거물급이라 노래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코러스를 쓰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다. 실용음악과는 물론이고 교회 성가대 출신도 아니었던 나로 말하자면 그녀와 20년 지기로, 대학 입학 전까지는 자타공인 가수 "지망생"이었다는, 그러니까 순전히 그녀의 "기억"에만 의존한 차출인 셈이었다. 요컨대 학연, 지연, 뭐 그런 거다. 아, 물론 학교 오락시간마다 불려 나가거나 음악 실기 만점, 그 정도는 했다, 내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선상이었고, 이건 프로 아닌가. 소심증이 지병인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농담일 거야.


처음엔 그냥 웃었다. 얘가 지금 뭐래. 다음엔 기겁했다. 그 당시 가요 탑텐을 도배하던, 심지어 음악성으로 승부하던 팀의 수요예술무대 코러스라니. 당연히 못한다고 했다. 할 수 있단다. 못한다, 할 수 있다, 미쳤냐, 왜 안 되냐, 그걸 말이라고 묻냐, 내가 안다,


버스가 섰고 우리는 내렸다. 그녀는 내일 연습 일정을 냅다 던진 뒤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날 밤 나는 방송 예정곡을 거짓말하지 않고 200번 들었다. 누가 옆구리만 찔러도 절대음감처럼 내 파트가 튀어나올 수 있도록.


드디어 그 내일이 왔고, 세상에나, 정말로 나는 연습실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연습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예의 그 유명 가수가 앉아 있었는데 나로선 그 가수보다 키보드 앞에 앉아 있던 정원영 씨를 보고 더 질겁을 했다. 무슨 일이었는가 하면, 마침 다음 달에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수요예술무대이니 만큼 이왕이면 콘서트 세션과 방송을 하기로 했다는 거다. (지금은 잘 모르겠고, 당시 잘나가던 가수들은 방송용 세션과 콘서트용 세션을 따로 섭외했다. 아무래도 방송은 한두 곡 정도만 소화하면 되는데 반해 콘서트는 대체로 한 번에 30곡 정도를 소화해야 하기에 주로 탑 라인으로 구성된다. 물론 조용필 씨나 이승철 씨처럼 재정이 넉넉한 가수들은 줄곧 콘서트 세션과 함께했다.) 키보드뿐만 아니라 기타도 드럼도 베이스도 세션들 면면이 모두 탑 오브 탑이었다. 이건 뭐 완전 미쳤다.


긴장했던 기억이 없다. 왜냐면 나는 긴장할 여력도 없었다. 내 파트를 까먹을까 봐 해당 음역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세션 소리가 그토록 클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 날이 내가 마이크 앞에 선 첫날이었으니 당연하다. 바로 옆에서 두들겨대는 드럼과 이글이글대는 기타 사운드에 내 목소리는 거의 전혀 들리지 않았다. 모니터링을 조정하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건 메인들에게나 가능하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정확한 음을 내야 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거다. 정확한 음을 못 내면 어찌 되느냐고? 바로 잘린다.(실제로 나는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다른 어떤 가수의 방송 직후에 잘린 적이 있다.) 그저 죽도록 집중해서 듣고 죽도록 내 음을 기억해내 소리를 내야 했다. 나중엔 세션들 소리에서 내 파트의 음을 꺼내는 고급 기술을 체득했지만, 첫날은 온통 나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다.


녹화 당일이 왔다. 음향 리허설과 카메라 리허설을 거치며 7시간의 대기 끝에 방송 녹화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무리없이 마쳤다. 대기실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있을 때, 관계자들과 인사하느라 뒤늦게 대기실로 돌아온 가수가 매니저를 부르더니 일부러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다음 달 콘서트도 오늘 코러스로 갈게요.


돌이켜보면 무슨 근자감이었는지 새롭다. 심지어 그 첫날에 나는 온갖 세션들 파트가 뒤엉켜 있던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아주 그냥 일반인이었다. 그건 믿음보다는 그저 열망이었던 것 같다. 십여 년을 마음 속에만 품고 살아왔던 꿈과 하루나마 조우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같은 거. 우연과 열망이 시너지를 일으켜 생긴 커다란 파문이었다.


콘서트 연습 중에 인상적인 게스트가 있었다. 내 기준으로는 너무나 노래를 못해서 도대체 저 사람은 뭘까, 연구하게 될 지경이었다. 피치(pitch)의 어긋남이 가히 전위예술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가 연습을 마친 뒤에 이렇게 말해서 세션들의 폭소를 끌어냈다. 나 오늘 죽이네. 표정을 봤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더욱 기가 막혔다. 내가 태어나 접했던 최강의 근자감이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뒤 그는 정말로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겨우 몇 년 새 노래를 잘하게 된 거냐고? 그럴 리가. 예술은 많은 부분 태어날 때 가지고 와야 한다. 그는 그 많은 부분은 사실상 포기한 채로 나머지 부분에 매달렸다. 강렬한 무대 매너, 인간성, 인간관계, 성실성, 사회 봉사 등등. 그는 어디까지가 재능의 영역인지에 대한 잣대 그 자체였다.


나에게 있어 진정한 근자감은 그 후 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출현한다. 딸아이 수능 후 면접 준비를 하던 때였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외고 학생들 대부분이 면접 준비를 위해 따로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나는 천편일률적인 면접 준비가 내 아이를 차별화할 수 없다고 굳건히 믿었고, 그래서 내가 직접 면접 준비에 뛰어들었다. 내신과 학생기록부와 입학지원서 내용이 동그란 원을 그리듯 서로 만나도록 예상 질문을 뽑고 모의 면접을 진행했다. 내가 안방 책상 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아이가 방문을 노크한 뒤에 들어와 먼저 인사하고 문을 닫은 다음 앉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상 질문과 모범 답안까지 매일 서너 차례 반복했다. 하필이면 내 아이의 미래가 달린 문제에서 근자감의 출현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아찔한 어머니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근거도 없이 믿었다. 입학사정관도 사람이고, 40년 이상 해묵은 사람이 하루에 수십 명의 지원자를 만날 때 일반적으로 원하게 되는 태도와 중점적인 질문이 있다는 것을.


입학사정관은 세 가지 질문을 했고, 그 중 두 개가 나와 매일같이 준비했던 예상 질문이었다. 울상에 가까운 표정으로 학교 건물로 들어갔던 아이가 웃으면서 나왔다.


지나고 보니 인생은 근자감이었다. 저질러보는 게 상수였다. 해보지도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무궁무진한 시간들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풍요롭게 해주는 순간들이다. 밑져야 본전 아니고, 밑지면 크게 밑지게 되는 현실들도 허다한 게 사실이지만 그건 눈에 보이는 결과만 따졌을 때 그렇다. 저지르는 사람은 실패까지 합해서 그만큼 더 가진 자가 된다. 시도의 기억이 많은 자가 근자감이든 자신감이든 낭패감이든 절망감이든 더 많이 갖게 되고, 꿈이란 뭐든 더 많이 가진 자의 특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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