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4일 토요일, 이방인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 알베르 카뮈, 이방인
확신이라...
확신, 보다는 귀, 가 있다 내게는.
채워지고 채워지고 채워져 가득 차오른 어느 날,
도망쳐
라고 또렷하게 들리는 내 목소리를 듣는 귀.
확신이 내일에 관한 얘기라면,
귀는 어제에 관한 얘기라서,
귀가 열렸다 닫힌 뒤에는 아주 오래 조용히 견뎌야 한다.
귀가 여닫는 확신은 인생과 진리,
인지는 잘 모르겠고,
설득과 책임에 보다 가깝다.
애초에 인생도 진리도 내 쪽에서 만들어가는 일방통행로라면 뫼르소의 확신은 어쩌면 옳다.
하지만 뫼르소도 이십대에 죽지 않고 좀 더 살아남았다면 아마도 확신 같은 말은 책장에 꼽아 두었을 게다.
내내 잊고 지내다 뜻하지 않게 발견되어 회한과 희열을 동시에 안겨주는 고서처럼.
어제 나는 그 고서를 빼 들고 회한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도망쳐,를 듣고 도망 나온 곳의 혼란과 무질서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우선은 전율이 일었다.
나는 어떻게 알았던 거지.
거의 완벽한 조건의 그곳을 도망 나오는 길에는 누구보다 나 자신의 오랜 설득이 요구되었다.
내면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아 소진하느라 도망 후 꼬박 이주일 동안 꼼짝 없이 앓았다.
확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확신보다는 위로.
그러니까 아마도 확신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은 위로가 필요한 순간일 것 같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에 가까울 듯하다, 확신이라 함은.
그렇다면 믿어주겠다.
혼자 가야 할 길에 그마저 없다면 너무 미천하잖은가.